주간동아 694

..

따뜻한 ‘함안차사’를 아시나요?

성종 때 아버지 목숨 구하기 위해 기생 된 노아 … 판관 4명 유혹한 끝에 ‘효도’

  •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7-08 11: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따뜻한 ‘함안차사’를 아시나요?

    조선시대 화가인 김양기의 ‘투전도’`. 기생으로 보이는 여성이 투전판에 술상을 들여오고 있다.

    조선 성종 때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는 경상도 함안 땅에 절세 미녀의 딸을 둔 자가 있었는데, 그만 죽을죄를 지었다. 사죄(死罪)인 만큼 지방 수령이 처리할 수 없어 중앙에서 판관을 내려보냈다.

    그 사이 죄인의 딸인 노아(蘆兒)는 부친의 목숨을 구하고자 기적에 입적해 기생이 됐다. 노아는 매력적인 미모에 학식까지 있어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였다. 판관이 내려오자 노아는 형방(刑房)에 돈을 써서 천침(薦枕·잠자리에서 모심)을 자청했는데, 판관은 그녀의 자색에 정신이 몽롱해 하룻밤을 자고는 노아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갈수록 더해지는 노아의 재치 있고 융숭한 접대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준재로 유명한 윤(尹)모를 내려보냈는데 “반드시 노아부터 처벌하고 그 다음 아비를 치죄할 것이다”라고 호언한 이 전도양양한 젊은 교리(校理)도 노아의 품속에서 녹아버리는 전철을 밟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 대신들은 이번에는 그야말로 강직함과 엄격함으로 이름 높은 사헌부 지평(持平) 최(崔)모를 판관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는 융통성이 없고 청렴한 젊은 학자여서 전후 이야기를 듣자 매우 분개하며 “준엄한 왕명을 받고 옥을 다스릴 자가 계집에게 현혹돼 사명을 다하지 못하니 노아는 필시 요물일 것이다. 내가 내려가면 얼굴조차 안 볼 것이고, 판관들을 홀린 죄를 다스려 죽여버릴 것이니 이번 치옥(治獄)은 빨리 결말이 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먹 묻힌 실로 팔뚝에 이름 새긴 ‘작업’



    이 소식을 접한 함안 사람들은 “이번에는 노아가 그 아비를 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팔청춘 젊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 새 판관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노아는 함안에서 40리 떨어진 칠원(漆原) 영포역(靈浦驛)으로 가서 뇌물을 주고 역장 내외를 구워삶았다.

    그러고는 분기 없는 얼굴에 소복을 입고 시골 아낙네가 어사(御史)의 행차를 구경하는 흉내를 내면서 눈에 띌 듯 말 듯 역참(驛站)의 부엌과 앞마당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무심코 보던 판관의 가슴이 노아의 유난히 단아한 모습에 설레기 시작했다. 점심만 먹고 떠나야 할 일정이었지만 공연히 핑계를 대서 우물쭈물하다 날이 저물었다며 그 역장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저녁을 든 다음 판관은 역장 마누라에게 “오늘 낮에 그 소복한 아낙은 어느 가문의 딸이냐?”라고 물었다. “어느 가문은요, 제 집의 천한 딸인 걸요”라는 역장 마누라의 대답을 듣고 판관은 은밀히 노아를 불러들였다. 방안은 좁았지만 촛불 빛에 아늑한 기운이 돌았고, 머리를 숙이고 앉은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남자를 끄는 힘이 강렬했다. 그로부터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을 때까지 두 사람은 ‘환정양진(歡情兩盡)’의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함안차사’를 아시나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 노아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1920년 무렵의 기녀.

    판관은 헤어져야 할 일을 생각하니 못내 아쉬워 “내가 죽은들 너를, 이 밤을 잊을 수 있으랴”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노아의 눈에도 이별의 정을 가누지 못하는 눈물이 서려 애끓는 심정의 판관을 더욱 괴롭혔다. 노아는 실에 먹을 묻혀 판관의 이름을 자기 팔뚝에 새기게 하고는 하룻밤 정을 아쉬워했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어사의 행차가 존엄한데 촌가에서 오래 지체하시고 천한 몸이 귀한 분을 모시어 이미 분(分)을 범했습니다. 혹시 이 일이 관가에 알려지면 부모님에게까지 벌이 미칠까 두렵습니다. 아직 인연이 끊이지 않았다면 또 뵙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 후 판관은 함안 경내에 들어오자마자 죄인의 딸을 잡아들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나졸들이 노아의 집을 엄습해 관아로 끌고 나왔다. 판관은 노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큰 칼을 씌우라고 명하고는 아랫배에 힘을 주어 “요망한 것 같으니, 요사스런 솜씨로 어사들을 미혹하게 해 법을 어지럽힌 죄인이니 당장 때려죽여라”고 꾸짖었다.

    관정(官廷)에는 삼엄한 기운이 돌았고 나졸들은 묵직한 곤장을 들고 큰 칼을 쓴 노아 곁에 다가왔다. 그 육중한 곤장으로 맞으면 당장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노아는 소리 높여 “어사님, 잠깐만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의 죽음을 늦춰주십시오. 비록 죽을죄를 지은 죄인입니다만 법대로 저의 공초(供草·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적은 문서)를 보시고 벌을 내리소서. 어사또께서 한 번만 공초를 읽어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다.

    관직 버리고 노아와의 사랑 선택한 판관

    판관도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어 사령을 시켜 노아가 써온 공초를 들이라고 했다. 공초에는 먼저 자기 아비의 억울한 사연이 조리 있게 적혀 있었고, 이어 별지에 시 한 편이 쓰여 있었다.

    蘆兒玉臂是誰名 刻入肌膚字字明
    寧見洛東江水盡 妾心終不負初盟
    (노아의 옥 같은 흰 팔에 새겨진 이름은 누구인고
    살갗에 깊이 새겨진 글씨가 뚜렷하구나
    차라리 낙동강 물이 마르는 것을 볼지라도
    이 마음은 끝끝내 첫 맹세에 어긋남이 없소이다)

    판관이 깜짝 놀라 바라보니 어젯밤 영포마을의 여자였다. 비로소 노아의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후회막급이었다. 판관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 하고는 어쩔 수 없이 판결을 미루고 말았다. 물론 판관은 노아를 옥에서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또 꿈같은 시간이 흘렀고 판관은 와병을 구실로 사표를 냈다.

    세상에서는 이 사람을 ‘함안차사(咸安差使)’라 불렀다고 한다. 이상은 경상도 ‘함안군 읍지’에 전하는 일화인데, 조선 건국 초 부자간의 가혹한 권력투쟁에서 생겨난 함흥차사(咸興差使)의 유래보다 매혹적인 여성의 기지와 헌신적이고 따뜻한 효심을 보여주는 함안차사가 훨씬 가슴을 저민다.

    대한민국 국회가 한 달 가까이 공전하다 등원을 거부하는 야당을 배제한 채 여당 단독으로 가까스로 6월26일 개원했다. 이번 임시국회는 최대 이슈인 미디어법안과 비정규직법안을 처리해야 하는데 여야가 아전인수로 대척점에 서 있는 형국이다. 미디어법은 여야가 지난 3월 표결 처리하기로 문서로 합의까지 했지만 이해관계로 논쟁이 첨예하게 재연되고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법은 실업대란이 우려되는 만큼 시급히 타결해야 할 민생 현안이다.

    입버릇처럼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하는 이 땅의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논쟁을 안 하고 왜 국회를 떠나 장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고명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실제와는 달리 명성만 있어 남에게 존경받는 ‘해조피풍(海鳥避風)’의 고사대로라면 민망할 따름이다.

    살벌한 함흥차사가 되든, 따뜻한 함안차사가 되든 선량들이 국회로 돌아오지 않으면 기축년 대한민국 여름의 역사는 헌정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