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30일 임기가 시작되는 18대 국회에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다는 초선의원은 137명. 그중 ‘차세대 리더’ ‘주목받는 초선’으로 꼽히는 28명을 7주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1960년생<br>서울 창문여고<br>세종대 역사학과<br>대통령 공보수석, 환경부 차관
재야운동권 출신인 박 당선자가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95년이다. 김근태 의원 등과 함께 국민회의 창당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현실정치에 뛰어든 것. 당시 국민회의는 정계를 떠나 있던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재기를 위해 재야세력과 힘을 합쳐 만든 새로운 당이었다.
박 당선자의 첫 역할은 당 부대변인. 차분하면서도 매사에 성실하고 치밀한 그의 일처리는 김 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 전 대통령은 박 당선자에 대해 “겉모습은 수양버들 같지만 속은 강철 같은 심지를 가진 여자”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의 능력은 노무현 정권에서도 높이 샀다. 2003년 말 친노세력 등이 민주당을 깨고 집단 탈당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서도 박 당선자를 영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당을 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올해 초 5년 만에 다시 합쳤는데, 그사이 우리 지지층에게 너무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박 당선자는 당시 총선출마 대신 환경부차관 제의를 받아들였다. 차관 재임기간에 그는 환경부를 위해 여러 부처의 차관들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펼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지난 대선 때는 정동영 대선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전략기획위원장으로, 올해 총선 때는 총선기획단 부단장으로 최일선에서 선거를 치렀던 박 당선자는 연거푸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완패한 지난 대선과는 달리 이번 총선 때는 박빙의 승부가 펼쳐진 데가 적지 않다. 이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건강하고 균형 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진보적 가치를 지켜줄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박 당선자는 “정치를 대국민 공공서비스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에게서 세금을 받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서울 도봉갑 신지호 당선자“미래를 위한 새로운 보수의 길 개척”
1963년생<br>서울 경기고<br>연세대 경제학과<br>자유주의연대 대표
신지호(45) 당선자는 이른바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인사다. 그는 2004년 5월27일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하면서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이날 연세대 강연에서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 다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보수는 힘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자, 적자생존 철저히 적용하자, 약육강식이 우주섭리 아니냐라는 쪽에 가깝다. 반면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고쳐가며 살자는 것이다.”
신 당선자는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보수-진보관에 뜨악했다.
“‘차떼기 사건’ 등으로 ‘썩은 보수’ ‘낡은 보수’가 회자될 때죠. 탄핵에서 생환한 노 전 대통령도 보수를 맹폭했고요. 1980년대에 멈춰선 낡은 진보 이념을 갖고는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요원합니다. 미래를 위해 새로운 보수를 대안으로 제시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 뉴라이트 운동입니다.”
신 당선자가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옷을 갈아입은 때는 1992년. 그전까지 그는 인천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자유주의자로 전향한 것은 아니고요.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쌓이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됐죠. 굳이 전환점을 꼽는다면 앨빈 토플러의 저서 ‘권력이동’을 읽은 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는 우파로 옷을 갈아입은 뒤 게이오기주크(慶應義塾·게이오대)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북한 문제에 천착해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다. 현재는 자유주의연대 대표, 뉴라이트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북한은 비정상적 국가입니다. 정상화돼야죠. 비정상의 정상화에 초첨을 맞춰 대북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명박 정부가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북관계에서 지원을 해주는 ‘갑’의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을’ 노릇을 하면서 저자세로 접근했어요.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도울 것은 도우면서도 당당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한나라당 서울 성동을 김동성 당선자“국가위기 관리시스템 재정비하고파”
1971년생<br>서울 성동고<br>서울대 법학과 <br>제36회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_일찍 정치무대에 데뷔했는데….
“초중고 시절은 물론 대학 때까지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 때만 제외하고 줄곧 낙선했지만….(웃음) 1993년에는 서울대 경실련 학생조직을 이끌고 NL/PD 구도와 맞서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존경받는 정치인을 꿈꾸며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_왜 NL이나 PD가 아닌 경실련이었나.
“대학시절 운동권 공부를 하면서 한마디로 ‘공산주의 하자’는 결론을 접하고 크게 실망했다. 사회문제를 실용적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경실련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내내 운동권들에게서 ‘기회주의, 수정주의’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이번 선거에서 (운동권을) 이긴 셈이 됐다.”
김 당선자는 2000년 1년간의 짧은 판사생활을 경험하고 곧장 냉혹한 변호사 시장으로 방향키를 돌렸다. 외환위기로 나빠진 가정형편도 이유가 됐지만 직장인 같은 판사생활보다는 좀더 역동적으로 정치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발동한 셈이다. 그는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을 시작으로 2004년 서울특별시 고문변호사로 이명박(MB)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단순명쾌한 성격이 MB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_정치철학이 있다면?
“실용주의다. 보수진보의 틀은 낡았다. 철저하게 실질을 숭상하고, 의리와 신의를 중시하는 애국적 실용주의로 정의 내리고 싶다. 무엇보다 정치란 국민을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해줘야 한다. 실제 박정희 이승만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_어떤 일을 하고 싶나.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가위기 관리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싶다. 추가로 몽골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데 초석이 되려 한다. 몽골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형제국가라 생각한다.”
자유선진당 충남 아산 이명수 당선자“좌절 겪은 만큼 통합 용광로 만들 터”
1955년생<br>대전고<br>성균관대 행정학과<br>충청남도 행정부지사
그는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다. 행정고시(22회)에 합격한 뒤 충남도에서 주로 일했다. 일처리가 깔끔해 고시 동기들보다 승진도 빨랐다. 40대에 공직 최고직인 1급 관리관에 오른 것.
한나라당에서도 “우리와 함께 가자”며 구애의 눈길을 보냈을 만큼 그는 지역정가에서 ‘블루칩’으로 통해왔다. 그러나 충남도 행정부지사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접은 뒤 뛰어든 정치판은 생각보다 험했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 때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으나 열린우리당 바람이 불면서 낙선했다. 이듬해 보궐선거에선 열린우리당에 영입됐으나 2중 당적 문제가 불거져 출마를 포기했고, 2006년 지방선거 때는 국민중심당 간판으로 충남도지사에 도전했다가 패배했다.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정치라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면서 준비가 부족했어요. 좌절을 경험해본 만큼 앞으로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당선자는 정치란 찢긴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용광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이 나무를 가꾸는 일이라면 정치는 숲을 꾸리는 일이란다.
“나는 정치인은 큰 봉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봐요.”
그는 18대 총선에서 나름대로 선전했으나 지역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자유선진당의 한계도 잘 알고 있다.
“교섭단체 구성요건 문제도 그렇고,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정당들과 달리 ‘오래가는 정당’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해야죠.”
자유선진당은 ‘자유’라는 이념을 강조하는 보수정당이다. 한나라당 못지않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큰 그림에서 개방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과의 이번 합의는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무슨 이벤트처럼 이뤄졌습니다. 한마디로 절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봅니다. 일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