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황상민</b><br>연세대 교수·심리학
그리스 신화를 통해 삼성그룹의 변신과 생존능력을 풀이한 기사는 탁월했다. 제우스와 이건희 회장을 치환한 묘사가 우리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삼성 신화의 비극이라면, 엉터리 통계를 만들어내는 통계청 이야기는 한국사회의 비극 그 자체다. 이 기사는 단순히 잘못된 통계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국가운영을 진단하는 것이었다.
구멍가게 수준의 주먹구구식 땜질이라는 표현이 생각났다. 자신의 품질진단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통계청은 성적표를 부모에게 보여주지 않고 거짓말하는 꼬마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런 통계청이 왜 있어야 할까?
‘그 누가 대한민국 ‘을(乙)’을 꺾을쏘냐’ 기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을의 위치와 생존법에 대한 통념적이고 상투적인 처세술의 나열이었다. 갑의 위치에 있던 공무원들이 을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번 해보는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을의 이야기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제5회 서울환경영화제를 알리는 기사는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환경을 주제로 한 영화제가 따로 있어야 하는 의미는 알겠지만, 분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성화 봉송과 관련한 중국 유학생들의 난동 기억이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성화 봉송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사는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더 큰 의문을 던져주었다. 왜 올림픽 역사에서 히틀러에 의해 시작된 이 행사를 지금까지 계속하는 것일까?
이탈리아 노인들의 도우미 기사는 쓸쓸한 정보였다. 매주 풍성한 문화 기사 중에서 이번 주에는 뮤지컬 ‘빨래’에 관한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힘든 현실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희망을 상징한다니, 기사만 읽고 끝낼 게 아니라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