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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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후지모리 일본 생활 ‘따봉’

페루 탈출 1년 경과, 도쿄서 회고록 집필중 … 빼돌린 돈으로 편안한 생활 추정

  • < 김문혁/ 테러리즘 전문기자 > aporiak@hotmail.com

    입력2004-11-24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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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자 후지모리 일본 생활 ‘따봉’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일본으로 달아난 뒤, 팩스로 대통령 사퇴서를 보낸 지 꼭 1년이 지났다. 후지모리는 페루 정부의 시각에선 중요 수배자다. 지난 9월 초 페루 검찰은 1990년대 초 일어난 두 건의 학살사건과 관련해 후지모리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콜리나 그룹’이라고 하는 페루 특수부대는 91년 수도인 리마 인근 빈민 지역에서 15명, 그리고 92년에는 9명의 대학생과 1명의 교수를 함께 살해했다. 페루 검찰에 따르면, 후지모리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사전에 상세한 보고를 듣고 그 비밀작전을 승인했다. 그래서 페루의 반일감정은 흉흉하다. 리마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지모리 소환을 요구하는 시위가 그칠 새 없다. 일본 국기가 불타기도 한다. 덩달아 페루의 일본인 이민자 8만명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후지모리는 도쿄 중심가 고급 아파트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며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일본 보수파의 후원금 덕분이라고 후지모리는 말한다. 그들이 모아 전달한 돈은 현재 100만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거액을 해외로 빼돌렸을 것은 뻔해 보인다. 100만 달러 후원금은 어쩌면 ‘대외용’일 뿐이다. 전처이자 정치적 앙숙인 수잔나 히구치 의원(페루 야당 독립도덕전선 소속)은 후지모리가 1250만 달러를 도쿄은행 계좌로 빼돌렸다고 주장한다. 이 돈은 90년대 초 후지모리가 대통령 당선자 시절 수차례 걸쳐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후원금이라는 것이다.

    이즈음 페루 옥중에 갇힌 전 페루 정보기관 총책 몬테시노스가 흘리는 얘기와 페루 검찰이 벌이는 조사를 종합해 보면 히구치 의원이 말하는 돈도 후지모리로선 ‘껌값’일 듯하다. 몬테시노스는 돈세탁 창구로 전 세계 마피아 조직들이 애용하는 카리브해 일대 금융기관에 3400만 달러 이상 예치한 것을 비롯해 스위스 은행 등에 모두 2억5000만 달러를 넣어둔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후지모리 몫일 가능성이 크다.

    후지모리와 일본 보수파들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이들이 후지모리와 자주 만난다. 일본 우파들은 후지모리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일본에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후지모리는 90년 대선 때부터 일본을 이용해 왔다. 그가 1차 선거에서 2등을 하고도 2차 투표에서 보수적 정치인인 마리오 바르가스 로사를 이길 수 있었던 데는 “후지모리가 당선되면 경제강국인 일본이 밀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든 덕도 크다.



    도망자 후지모리 일본 생활 ‘따봉’
    지난 9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한때나마 원조를 중단하고 후지모리를 비난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을 따라 잠시 흉내만 냈을 뿐, 곧 그의 집권 내내 강력한 후원자 노릇을 맡아왔다. 96년 12월 좌익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 게릴라 잔존세력이 리마 주재 일본대사관을 급습해 일본 왕의 생일 축하연을 벌이던 인사들을 붙잡고 장기 대치를 벌였다. 그때 이를 강력하게 진압한 것도 일본을 의식한 측면이 강하다. 후지모리는 일본의 무사(사무라이)를 흉내내듯, 검은색 전투복장을 하고 현장을 지휘했다.

    후지모리가 망명 결심을 굳힌 결정적 계기는 무엇일까. 스위스 검찰당국이 지난해 11월 “스위스 국내 여러 은행에서 몬테시노스 명의로 된 7000여만 달러의 비밀계좌를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였다는 게 정설이다. 스위스 비밀계좌는 이즈음 옥중의 몬테시노스가 주장하듯, 사실 후지모리 계좌였다.

    정치학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플라톤의 ‘공화국’은 독재자가 이성과 인본주의를 누르고 전권을 휘두르는 세 가지 강력한 동인(motives)으로 야망, 두려움 그리고 탐욕을 꼽는다. 후지모리 집권 10년을 보면 2400년 전 플라톤의 지적은 놀라울 만큼 족집게다. 5세 때 페루로 이민 온 후지모리는 자신이 페루를 재건했다는 찬사를 듣고자 하는 야망을 보였고, 독재에 대한 비판세력의 저항과 내부적 배반을 두려워했고, 천문학적 비자금을 마련하고 헌법을 고쳐가며 무리한 3선의 탐욕을 보였다.

    “From Tokyo”. 후지모리가 지난 여름 연 홈페이지(www.fujimorialberto. com) 제목이다. 지난해 8월 후지모리의 무리한 3선 연임 시비에서 촉발된 페루 정치 위기를 취재하러 갔을 때 야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발렌틴 파냐과 의원(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도망간 뒤인 2000년 11월 당시 임시대통령)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식축구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지모리의 행동은 종잡기 어렵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변명을 시작한 것도 후지모리식 튀는 행동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악의적으로 왜곡된 개념들을 명확히 하고, 비방 캠페인에 반격을 가하려 한다”고 밝혔다(상자기사). 그의 웹사이트는 재임중 이룬 ‘업적’으로 일본대사관 인질 구출과 테러리스트 소탕, 그리고 인플레 진정 등을 꼽고 있지만 짜임새가 어설프다.

    90년 대통령 당선 직후 후지모리는 시카고학파 유의 충격요법을 도입해 당시 연 600%에 이른 인플레를 잡고 극좌파 게릴라 ‘빛나는 길’과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 세력을 잡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그가 9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중상층 페루 국민은 그를 받아들였다. 이는 72년 박정희 유신 쿠데타를 우리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지지한 것과 흡사하다.

    집권 중반기부터 후지모리는 전기, 통신, 광산 등 주요 국영기업들을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 기업에 팔아 넘겼다. 미국은 경제개방과 투자안정 논리에 집착해 후지모리 독재를 견제하지 않았다. 남미를 미국의 텃밭으로 여기는 미국에게 후지모리는 믿음직한 정치인이었다. 조지워싱턴대학의 페루 전문가 신시아 메클린톡 교수는 “후지모리가 좌익 게릴라를 잡고, 자유시장경제로 페루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히니 미국의 신뢰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진단한다.

    남미는 지난 80년대만 해도 군사독재 판이었다. 국제 비교정치학계에선 후지모리가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떠오르는 추세다. 선거로 뽑힌 문민 정치인이 가뜩이나 민주화 경험이 짧은 후진국가에서 흔들리기 쉬운 민주주의의 싹을 어떻게 교묘히 잘라냈는가 하는 점이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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