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8

2003.08.21

베일 벗은 조선시대 법의학 교과서

  • 입력2003-08-13 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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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일 벗은 조선시대 법의학 교과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에 천지의 모습을 본받고 부모로부터 형체를 품부(稟賦)받았으니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이가 없지만, 수(壽)를 다하지 못하고 불행히 비명횡사하면 초검과 복검을 하는데, 판정이 분명하지 못하면 죽은 자나 산 자 모두 그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된다.”(‘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중 ‘자액자의’에서)

    1438년 세종의 지시로 최치운 등이 완성한 ‘신주무원록’은 무원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명(人命)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원통함이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법의학 지침서다. 이 책은 1308년 원나라 학자 왕여가 편찬한 ‘무원록’을 토대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주석을 단 것으로(그래서 ‘신주’라는 말이 붙었음), 이후 영·정조시대에 ‘증수무원록’ ‘증수무원록대전’ ‘증수무원록언해’ 등 증보판이 잇따라 출간돼 조선시대 법의학의 표준이 마련됐다. 그리고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김호 박사가 국내 최초로 ‘신주무원록’을 완역함으로써 조선시대 법의학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호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1994년 규장각이 소장한 조선시대 인명사건과 관련한 고문서(검시문안)를 접하고 비록 살인사건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생생한 민중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또 검안을 연구하면서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에 매우 과학적이고 정밀한 법의학 지식들이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 ‘무원록’은 당시 과학적인 수사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법의학 교과서였다.”

    물론 조선시대 검시기술은 오늘날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서양의학이 전수한 현대적 검시방법이 시체를 해부하여 사인을 분석하는 데 치중한 반면 조선시대 검시는 관찰에 무게를 두었다. 예를 들어 시체가 적색을 띠면 구타당했거나 목을 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선홍색은 자상으로 인한 사망, 청색 계통은 질식사, 푸른색은 독살 가능성을 의심했다.

    ‘신주무원록’에 실린 수사법 가운데 탄복할 만한 것은 자살로 위장한 타살을 밝혀내는 대목이다. 가령 칼 이외의 도구로 구타당해 살해된 경우 푸르고 붉은 상흔이 나타나지만 갯버들나무 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상흔 안이 짓무르고 상해서 검은색으로 변해 구타 흔적을 없앨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때는 직접 손을 만져보아 부어오르거나 단단한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또 죽기 전에 목을 매달아 자살로 위장하는 경우 상흔이 스스로 목을 맨 것(자액)과 비슷해 색이나 시체의 상태만으로는 자살, 타살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목을 맨 장소와 끈을 맨 상태 등 주변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밖에 ‘신주무원록’에는 살인사건의 조사과정과 집행절차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검시를 할 때는 검험관 외에 사건 관련 증인과 가족까지 입회하도록 한다든가, 사건을 조사하고 심문할 때 반드시 범인과 그 이웃, 목격자 등을 반복 심문해서 내용이 일치해야만 진술을 인정하는 등 수사의 정확성과 엄격함을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김호 책임연구원은 “흔히 사극에서 보듯이 주리를 틀며 ‘범행을 자백하라’는 식의 강압적인 수사는 원칙적으로 금지됐다”면서 “조선시대 한 고을의 수령은 사건이 나면 반드시 현장에 가서 증거를 확보하고 검시와 수사를 지휘하는 등 실무에 능통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조선시대의 수사방법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으나, 힘없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무원’의 철학만큼은 시대를 초월해 간직해야 할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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