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윤 기자]
테드 창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2016)의 원작이 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원작자다. 1990년 ‘바빌론의 탑’으로 데뷔한 이래 SF문학상 최고봉으로 꼽히는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각각 4차례씩 받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만큼 탄탄한 문학성을 자랑한다. 채 20편이 안 되지만 통찰력 번뜩이는 단편소설만 발표하는 그는 1년에 단편 하나 완성할까 말까 할 정도로 과작(寡作)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진짜 테드 창
영화 ‘극한직업’의 테드 창(오정세 분 · 왼쪽)과 SF 소설가 테드 창. [사진 제공 · CJ 엔터테인먼트, Alan Berner]
2015년 고구려 태조왕의 아들의 변신신화를 진화론적으로 다룬 단편 ‘진화 신화’가 국제 SF 웹진 ‘클라크스월드 매거진’에 한국 작품으로 최초로 번역, 소개됐다. 이 작품은 2019년 중국 최대 웹진 ‘미래사무관리국(FAA)’에도 실려 평균 조회수 1만 뷰를 훌쩍 뛰어넘는 40만 뷰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인공지능(AI)이 선상반란을 일으켜 사람 몸에 들어간다는 내용의 ‘얼마나 닮았는가’(2019)가 2019년 10월 다시 클라크스월드 매거진에 실렸다.
여기에 하퍼콜린스와 계약을 맺은 장편 ‘저 이승의 선지자’(2017)와 단편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015) 및 그 후속작이 2021년 상반기 출간될 예정이다. ‘저 이승의 선지자’는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며 배움을 이어가는 선지자와 그 제자의 대화를 통해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범아론(凡兒論)적 세계관을 펼친 작품이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열혈 팬으로부터 청혼을 위한 낭독 작품을 의뢰받고 써준 작품으로, 혼인서약을 지키러 성간여행에 나섰다 시간의 어긋남을 겪게 된 남성이 약혼녀에게 보내는 열다섯 편의 연서로 구성됐다. 그 후속작은 약혼녀의 편지로 구성될 예정이다.
“한국의 테드 창이라는 별명은 그만큼 뛰어난 작품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품 쓰는 속도가 느리다고 놀리는 의미에서 붙여진 겁니다.(웃음) 단편 하나 완성하는 데 자료 조사 한 달, 집필 한 달, 퇴고 한 달 등 최소 3개월 이상이 필요하거든요. 그래봤자 단편 하나 쓰는 데 1년 이상 심혈을 기울이는 테드 창에 비할 순 없죠.”
알파고의 파급 효과
그런 김 작가의 고민은 2016년까지만 해도 어렵게 완성한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의 모든 문예지는 SF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성조차 고려하지 않고 외면했다. SF 전문지는 가뭄에 콩 나듯 생겼다 스러지기를 반복했고, 어쩌다 웹진에 발표한다 해도 자비 부담으로 원고를 실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김 작가가 강원 평창에서 생활하는 이유 중 하나도 SF 전업작가의 삶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그러다 2017년 SF 작가들의 모임인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SFWUK)와 2018년 SF 팬들 모임인 한국SF협회(KSFA)가 창립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해외시장으로 진출하는 작품이 서서히 등장하자 허블, 안전가옥, 아작 같은 전문출판사도 늘어났다. 국내 SF는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2017년 9.6%, 2018년 117%, 2019년 35.7%로 폭발적 출고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문예지도 SF 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2017년 한국과학문학대상 중단편 대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초엽 작가가 2019년 발표한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것은 팡파르에 가까웠다. 2018년 4월 김초엽 작가를 인터뷰했을 때 가장 존경하는 작가로 꼽은 인물이 바로 김보영 작가였다.
“밀려드는 원고청탁을 다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됐죠(웃음).이제 와 생각해보면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특이점(우주 빅뱅을 가져오기 직전의 상태)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대결에서 알파고가 압승을 거두면서 먼 미래의 일인 줄 알았던 AI가 현실의 문제로 다가서며 미래의 이야기를 다루는 SF에 대한 실질적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해외에선 진즉 시작된 현상인데 유독 한국이 늦은 거였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세요. SF가 아닌 작품을 찾기가 더 어렵습니다. 미래 이야기를 다루는 SF만큼 세계적 보편성이 강한 스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모프와 허버트 탄생 100주년
프랭크 허버트(왼쪽)와 아이작 아시모프. [GettyImages]
“1950년대 발흥한 미국 SF시장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3명의 작가가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유명한 클라크는 예언가라 할 정도로 예리하게 미래를 예측했습니다. 해군 장교 출신인 하인라인은 ‘스타십 트루퍼스’로 대표되는 밀리터리 SF 개척자로,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가장 뛰어났죠. 어린 나이에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아시모프는 사실 그 중간의 어정쩡한 작가라 볼 수도 있는데, 박학다식함을 무기로 수백 편의 SF와 과학 논픽션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습니다. 저도 아시모프의 책을 읽으며 SF에 눈을 떴습니다.”
아시모프의 대표작으로는 수학을 통한 미래예측을 다룬 ‘파운데이션’과 200세까지 사는 AI가 등장하는 ‘바이센테니얼 맨’, 그리고 영화 ‘아이, 로봇’의 원작이 된 로봇시리즈가 꼽힌다. 특히 그가 창안한 ‘로봇 3원칙’은 지금도 로봇과 AI 연구의 금과옥조 대접을 받고 있다. 로봇 3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둘째,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로봇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2017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서 로봇에게 전자인간이라는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는 미래법안 마련에 착수할 때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서 출발했습니다. 로봇에게 인간과 비슷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은 자율주행 시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느냐와 관련됩니다. 자율주행차를 직접 운행하는 AI(로봇)와 자율주행차를 운행하는 제조사 중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릴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니 먼 미래의 일도 아닌 겁니다.”
아시모프가 엄청난 분야에서 재기를 과시한 여우였다면, 허버트는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고슴도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래행성 아라키스를 무대로 물이 아주 적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 생존투쟁을 그린 ‘듄’을 발표한 뒤 평생 그 후속작 집필에 매진했다. 특히 올해는 21세기 SF 천재감독으로 떠오른 드니 빌뇌브 감독이 새롭게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들려 큰 기대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기자였던 허버트는 미국 오리건주의 이동하는 모래사막을 심층 취재하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동받아 모래사막으로만 이뤄진 극한 환경의 행성 아라키스를 무대로 처절한 생존투쟁을 그린 ‘듄’을 발표한 뒤 여생 동안 이 시리즈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판타지 장르의 ‘반지의 제왕’에 비견될 만큼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춘 SF 서사극이죠. 심지어 지금은 그의 아들이 이를 이어받아 쓰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 생태소설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지구의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선 공기 속 수분이 차가운 금속에 닿아 이슬이 맺히는 원리를 이용한 소설 속 이슬응결기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몽골의 사막화로 황사와 미세먼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김보영과 김초엽으로 이어진 등불
김보영(왼쪽)과 김초엽 작가. [사진 제공 · 돌베개, 박해윤 기자, 조영철 기자]
“지면이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작가의 작품 역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단편밖에 발표할 수 없었기에 독자적 완결성을 지닌 작품 집필에 치중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의 요구에 의해서라도 장기 연재가 가능한 지면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춘 SF 서사작품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한국 SF의 빅뱅은 이제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류의 첨병이 된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SF를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유불선이 교차하는 한국의 신화에 세계적 첨단 과학기술을 접목한다면 중국과 미국은 물론, 유럽시장까지 충분히 공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장르문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문학 취급도 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바뀌는 겁니다. 장르문학 안에서도 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숙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IT(정보기술)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딱 한 작품만 쓰고 그만두자는 생각으로 SF에 입문한 김 작가가 15년 넘게 버텨줬기에 그를 등불 삼아 김초엽이 등장할 수 있었다. 김보영 작가의 작품에서는 여성과 장애인,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구를 읽을 수 있다. 청각장애가 있던 여성으로서 김초엽은 그것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포착했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SF의 가능성에 문학소녀의 꿈을 투사했다. 이제는 김초엽이 또 다른 누군가의 등불이 돼 그 꿈을 이어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