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3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스마트폰을 쓰는 지혜로운 인간’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명명했다. 2007년 1월 10일 탄생한 스마트폰 ‘아이폰’은 12년 만에 우리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에 익숙한 ‘포노족(族)’이 시장을 움직이는 주류가 됐다.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 유튜버 스타를 비롯해 다양한 산업과 문화 현장에서 디지털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신인류를 연쇄 인터뷰한다. 1회 주인공은 독서모임을 사업화해 창업 5년 만에 유료 회원만 5600명인 트레바리(매사 반대하고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순우리말)의 윤수영(31) 대표. 현재 300여 개 독서모임을 이끌며 서울 압구정, 안국, 성수, 강남역 등 4곳에 ‘아지트(지점)’를 운영하고 있다.
TREVARI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 [지호영 기자]
저는 내년에 기자 경력 만 30년이 돼갑니다만.
“제 나이랑 비슷하시네요.(웃음)”
트레바리 1호점을 낸 곳이 압구정동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창업 당시만 해도 퇴근해 독서모임에 간다는 것이 좋게 보면 ‘범생이’ 이미지, 나쁘게 보면 좀 이상한 거 아냐, 이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독서모임도 충분히 힙(hip)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죠. 힙하려면 힙한 느낌의 동네에 묻어가야 한다, 그래서 압구정을 택했습니다.”
‘힙’이란 게 명사로는 엉덩이, 형용사로는 ‘유행에 밝은’ 이런 의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느낌이죠.
“음… 사전적으로 풀긴 힘든데. 멋있다? 있어 보인다?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좋아요’ 많이 받을 것 같은 느낌?(역시 ‘이미지 세대’다운 답!) 뭔가에 꽂혀 집요하게 파고드는 오타쿠만 해도 마이너적이고 비주류인데, 힙은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점에서 인사이더죠.”
압구정 하면 우리 세대만 해도 ‘오렌지족’ 이미지가 있어요.
“‘그런 게 있었다 카더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나이 많은 축에 속하죠.(웃음) 우리에게 압구정은 강남, 가로수길 근처, 성형외과 많은 동네?”
압구정에 대한 기억 하나만 갖고도 확실히 세대 차이가 느껴지네요.(웃음)
“세대라는 말도 한국이 균질화된 사회였던 2000년대 이전까지만 유효한 개념인 것 같아요. 특정 연령대를 ‘세대’로 묶기에는 분화가 너무 많이 이뤄졌다고 할까. 이른바 ‘X세대’라는 것도 그 전 사람들이 네이밍(naming)한 건데, 거기에 속한 사람이 모두 같은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떤 것을 네이밍하거나 프레이밍(framing)해버리면 나머지 정보들을 많이 도려내야 해 오히려 정보 손실 폭이 굉장히 커진다고 봅니다.”
그는 질문 하나하나마다 펼치는 논리가 정연했다. 독서클럽 스타트업 CEO답게 ‘책의 힘’일까.
강남키즈 같은데 ‘금수저’ 출신인가요.
“금수저도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 정도면 굉장히 감사한 거죠. 물론 아파트나 빌딩을 물려받은 친구들과 비교하면 가난한 축이지만요.(웃음)”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전공엔 전혀 관심 없었어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요. 그냥 책 읽는 거, 생각하는 거, 노는 거를 좋아하는 사람이죠.”
뭐 하고 놀아요.
“술 먹고 음악 듣는 거. 조용히 혼자, 혹은 맘 맞는 소수랑.”
술은?
“위스키를 좋아합니다. 맛과 향이 다양하고 위스키마다 얽힌 스토리도 재미있어요. 위스키 좋아한다고 하면 사치나 허세로 비칠 수 있어 조심스러운데, 와인이나 수제맥주보다 싸게 즐길 수 있어요.”
술 하나를 마시더라도 다양성과 스토리에 주목한다는 그의 말에서 풍요의 시대를 물려받은 젊은이 특유의 주관과 감각이 느껴졌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편협함’
[사진 제공 · 트레바리]
“친구들이랑 ‘모여서 술만 먹지 말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했죠. 그래서 각자 써온 독후감을 화두로 수다를 떨었어요. 취향이 각자 다르니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는 게 좋았어요.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편협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졸업 후 인터넷회사 다음(Daum)에 들어갔죠.
“딱 어디를 찍은 건 아니었지만 직업 선택의 몇 가지 기준은 있었어요. 첫째는 상장사일 것, 둘째는 어느 정도 소셜(social) 마인드가 있으면서 ‘힙’할 것. 버릇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 스스로가 납득하지 않으면 모티베이션(motivation)이 안 되는 스타일이에요. 사복 입는 것으로 대표되는 플랫(수평)한 조직문화도 직업 선택 기준의 하나였는데, 당시 제 지식으로는 다음(Daum)이 적격이었어요. 네이버만 해도 이미 수직화된 조직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2014년 1월 마지막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일이 있었다죠.
“입사 몇 개월 만에 카카오하고 합병된 일이에요.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 상태였습니다. 1년 동안 팀장만 5명이 갈렸어요.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돌이켜보면 배운 게 무척 많아요.”
뭘 배웠죠.
“개인용 컴퓨터(PC) 기반인 다음이 인원이나 매출 규모 면에서 카카오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조직이었는데, 합병 과정을 모바일 기반인 카카오가 주도하면서 다음에서 일하던 임원이 많이 나갔어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절실하게 깨달았죠. 패러다임 시프트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고 모바일도 향후 마찬가지라는 거, 그러면서 창업을 생각했죠. 파도를 잘 타는 ‘굿 서퍼’가 되고 싶은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서핑 실력을 키우기엔 너무 안전하다, 언젠가 배에서 내리게 되는 날 내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더 큰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잃을 게 별로 없으면 용감해지는 법이죠. 그래서 젊음이 부럽기도 하고.
“페이팔 마피아로 알려진 피터 틸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한테 이런 말을 했대요. ‘단기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장기적으로는 더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저는 20, 30대에 ‘빡세게’ 정글에서 고생하는 게 인생 전체로 보면 총소득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해요. 잃을 게 없어 용감했다는 말도 맞습니다. 1~2년 하다 실패하면 ‘잘못했습니다’ 하고 다시 회사에 들어가도 되는 나이였으니까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욕망을 깨닫기까지
다음에서 나와 바로 창업했죠.“팔리면 팔릴수록 세상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른 것이 패션 아이템이었어요. ‘윤리적 패션사업’을 하겠다는 거였죠. 유통과정에서 항상 제기되는 환경이나 노동 이슈를 해결하면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고 시작했는데 뼈저린 실패를 맛봤습니다. 원가가 너무 높고 디자인이 뛰어난 것도 아니어서 3~4개월 만에 손을 털었습니다. 하지만 실패만은 아니었어요. 많은 걸 배웠으니까요.”
많은 걸 배웠다?
“사업은 성인군자가 하는 게 아니고 장사는 욕망에 기대야 한다, 선의는 있으면 좋지만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욕망이라는 걸 깨달았죠. 게다가 패션 인더스트리는 일개 스타트업이 하기엔 너무 큰 사업이었어요. 작게 시작하는 것의 중요성을 처절히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또 어떤 아이템을?
“통근버스 사업에 관심이 있었어요. 만원버스, 만원지하철에 시달리는 출퇴근시간을 밀린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는 행복한 시간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러다 규제 이슈와 맞닥뜨렸죠. 현재 우버나 타다 같은 ‘모빌리티’로 대변되는 사업들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구상 단계에서 접었어요. 저는 법(法)을 파고들면서, 규제를 뚫으면서 갈등을 극복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기존 종사자들과 싸우는 것도 맞지 않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일인데 답답한 싸움에 휘말리면서 악에 받치기는 싫었어요.”
트레바리는 세 번째 아이템이었네요.
“친한 친구가 네가 좋아하는 독서를 사업화하라고 권했어요. 처음엔 다들 독서클럽이 돈이 되겠느냐고 말렸는데 일단 시작해보고 잘되면 유료화로 가고 1차 유료화가 가능하면 몇 개월 단위로 가보자 등등 가설을 세운 뒤 맞아떨어지면 그때그때 가서 진화시켜보자, 이런 콘셉트였죠. 저는 플랜을 유기적으로 세우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냥 하는 스타일이죠.”
어떻든, 5년 만에 서울 심장부 네 곳에 지점을 냈으니 성공이라고 봐야겠죠. 어떤 부분이 (시장에) 먹혔던 것 같나요.
“이게요. 외부에서는 결과만 보는데 사실 미친 듯 수백, 수천여 개를 시도한 결과예요. 시도 대부분은 실패했고요. 수많은 기획이 망했고 그중 하나가 터진 거죠. 제 입장에선 망한 것과 된 것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요. 무조건 열심히 기획하고 몸으로 뛴 거죠.”
온라인 시대에 업종 자체를 매우 아날로그적이고 오프라인적인 아이템으로 정한 건 신선하다고 할까, 용감하다고 할까.
“그것도 운이에요. 사람들이 책을 안 본다, 출판시장은 망했다고 하지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30만 부, ‘82년생 김지영’이 100만 부, 이렇게 ‘읽는 사람들’이 있어요. 스타트업은 시장 규모나 트렌드보다 아무리 작게 보이는 시장이라도 독점할 수 있느냐 이게 관건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제로(0)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차별화할 수 있느냐, 거기가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딥러닝 인공지능 사고가 장착된 포노족
트레바리가 운영 중인 독서모임은 주제별로 300개가 넘는다. 과학책과 역사책은 물론 ‘사랑’ ‘실패’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주제가 된다. 회원들이 읽고 싶은 책을 투표로 결정하는 ‘무경계’ 모임도 있다. 윤수영 대표는 “독서모임은 만들고 싶지만 책 선정부터 운영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비즈니스의 출발이었다”고 한다. [사진 제공 · 트레바리]
“원하는 답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저는 인과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이런 걸 했는데 이런 로직을 거쳐 이런 게 일어났다고 하면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실제 맞는 이야기인지 검증 방법도 없고, 맞다 해도 전부를 포괄한다고 할 수도 없어요. 인과관계 스토리에만 너무 빠져버리면 나머지를 못 보는 게 많아요. 최대한 드라이하게 우리는 무엇을 했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 계획과 성과만 본다 주의죠. 딥러닝도 인과관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코릴레이션(co-relation·연관성)만 놓고 결과를 내는 메커니즘이잖아요. 앞으로도 인풋과 아웃풋만 나열하고 이것들의 상관관계를 병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알 듯 모를 듯한 답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인공지능 딥러닝의 사고체계가 장착된 듯한 신인류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만으로도 성과(?)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트레바리의 사업목적은 뭐죠.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을 더 친하게…. 적당히 도움도 되면서 돈을 많이 벌자.”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 같은가요.
“아직 반에 반에 반도 못 왔는데 커졌을 때를 생각한다는 건 사치죠. 지금 제 생각은 온통 새로 오픈한 ‘강남역 아지트’에 1만 명을 채우는 거예요.”
회비(4개월 단위로 19만~43만 원)만으로 운영이 가능한가요.
“올해 초 투자를 받기도 했는데 매출의 과반이 멤버십 피(fee)인 건 맞아요. 제일 많이 나가는 건 임대료, 인건비, 광고비 순이죠.”
페이스북 광고도 하나요.
“아마 기자님 뉴스 피드에 안 뜨는 이유는 우리의 타깃이 아니어서 그런 듯.(웃음) 그건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머신러닝이 판단하죠. 페이스북 엔진.”
자정까지 일한다
직원 30명이면 월급 주는 것도 큰일인데.“모두에게 좋은 회사는 있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잘 맞는 사람을 뽑으려고 많은 노력을 해요. 우리는 팀이 아니라 ‘셀’이라 부르는데, 있다가도 없어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한 사람이 여러 셀에 소속돼 있기도 한 구조입니다. 저는 동료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역할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서포트가 될지 고민이 많아요. 어떻게, 얼마나 투명하고 솔직하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소통이라는 게 의도한 대로 굴러가는 건 아니니까요. 대표는 고객, 직원, 주주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사람인데, 누군가를 불만족스럽게 해야 할 때도 있어요. 악당이 되는 기분이라 좋진 않죠.”
서른한 살 젊은 CEO의 어깨에 놓인 짐이 무거워 보였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젊은이들이 모두 허무와 냉소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도 했던데.
“냉소나 허무, 무기력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남들에게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느냐 하는 건 월권이자 교만이죠. 다만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과 친하지 않을 ‘권리’는 내게 있잖아요. 사회가 변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한 것 같고. 어차피 죽을 거 열심히 살 필요가 있느냐, 진짜 힘든데 어떻게 의욕을 갖고 사느냐 하는 사람도 그 나름 이유와 근거가 있겠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긍정하면서 거기서 의미를 찾고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맥락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왜냐고요? 제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매일 밤늦게까지 일한다죠.
“요즘엔 새벽 1시 전에 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하반기부터는 자정 전 퇴근하는 게 목표입니다.”
회원의 주 연령대는?
“30대 초·중반 여성이 제일 많아요. 65% 정도? 왜 그런지 인과관계를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콘텐츠나 경험재(經驗財·경험을 통해 얻는 재화)에 대해 여성들의 지불의사가 더 높은 것 같아요.”
그의 앞에는 많은 도전과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 넓은 바다로 나온 그의 앞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바깥세상이 온통 과거와의 싸움으로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요즘, 시종일관 미래와 희망을 말하는 청년을 만나고 나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