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주연의 정치코믹드라마 ‘국민의 일꾼’ 시즌 2의 포스터.
5월 취임할 젤렌스키는 지난해 12월 31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 전까지 정치 경력이 전무한 정치신인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선 소수민족인 유대계다. 그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은 2015년 10월부터 민영TV 1+1에서 방영된 정치코믹드라마 ‘국민의 일꾼’의 주인공이라는 점. 그는 정부의 부정부패를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공개돼 깜짝 스타가 된 뒤 대통령에 당선되는 30대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연기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첫 방영 때부터 시청률 30%를 기록하며 올해 초까지 시즌3가 나온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은 우크라이나 기성정치에 대한 국민적 환멸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옛 소련 해체 직후 독립했지만 정치권과 결탁해 국영기업을 불하받은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의 발호로 정경유착의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설상가상으로 친러시아 세력과 친서방 세력 간 내전과 갈등이 더해져 국민의 피로와 분노가 극에 달했다. 2013년 11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 심화와 인권침해에 반대하며 서방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인권을 지지하는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시위로 2014년 친러시아 노선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되고 친서방 성향의 기업가 출신 포로셴코 대통령이 당선됐다.
국민의 장밋빛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와 가까운 동부 돈바스 지역 2개 주가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군이 이에 개입하는 외환(外患)이 발생했다. 여기에 그 자신이 1조4000억 원대 자산가인 포로셴코 대통령이 부정부패와 방산비리 의혹에 시달리는 내우(內憂)까지 더해진다. 그 와중에 국회의원끼리 주먹다짐 결투가 벌어지고 부패의혹을 받는 국회의원이 분노한 유권자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이전투구의 상황까지 전개된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조사에서 세계 180개국 중 120위로 ‘유럽 최악의 부패국가’로 전락했다.
가상드라마가 현실정치를 잡아먹다
4월 21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승리 확정 후 기쁨을 나누는 젤렌스키. [AP=뉴시스]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런 제가 시스템을 깨고 여기까지 나온 것은 모두 포로셴코 당신의 결과물입니다. 당신의 실수와 지키지 못한 약속의 산물입니다.”
젤렌스키는 고등학생 시절이던 17세 때 러시아의 유머경연 프로그램 KVN에 출연하며 일찍부터 코미디언의 길을 걸었다. 키예프 국립경제대 법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지만 이미 19세 때 KVN 메이저리그에서 우승한 이후 희극단 ‘크바르탈 95’를 결성했다. 크바르탈 95는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련 국가에서 순회공연을 펼치며 실력을 쌓은 뒤 2000년대 들어선 방송 및 영화 제작사로 변신한다. ‘국민의 일꾼’의 제작사 역시 크바르탈 95다. 젤렌스키는 이 드라마의 주연뿐 아니라 총괄PD도 맡았다.
젤렌스키의 소속 정당 이름도 이 드라마 이름과 같은 ‘국민의 일꾼’(2018년 3월 창당)이며 주요 당직자 역시 ‘크바르탈 95’ 출신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대통령뿐 아니라 국가 자체를 코미디언들이 장악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젤렌스키의 드라마를 방영한 방송사 1+1의 소유주 이고르 콜로모이스키(56)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즈베키스탄 최대 상업은행인 프리바트방크를 소유해 우크라이나 2, 3위의 부자로 손꼽히는 유대계 올리가르히다.
친서방계로, 2014년 내전이 발발하자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정부군을 무장시키고 전세 역전을 이끌었다고 찬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부상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포로셴코 대통령이 2016년 ‘부실대출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프리바트방크를 국유화하자 이에 반발하며 이스라엘로 망명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그런 콜로모이스키가 자신을 저격하기 위해 젤렌스키를 국민적 스타로 키웠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향후 프리바트방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젤렌스키 정부를 평가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실 젤렌스키는 구체적인 선거공약보다 청렴한 이미지 하나로 대통령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해온 다른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치인과 차별화되는 리더십을 보여주리라는 기대 섞인 전망과, 드라마와 현실은 다를 것이라는 우려가 교차한다.
지미 모랄렐스, 베페 그릴로, 마르얀 세렉(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AP=뉴시스]
마르얀 세렉(42) 슬로베니아 총리 역시 코미디언 출신이다. 수도 류블라냐에 있는 연기대학을 졸업한 그는 24세부터 방송과 라디오에서 정치풍자쇼를 진행하며 정치인의 성대모사로 인기를 얻었다. 이를 토대로 2010년 중북부 도시 캄닉 시장선거에서 당선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2017년 대선에 출마했다 낙마했으나 2018년 총선에서는 자신이 발굴한 정치인을 앞세운 정당 ‘마르얀 세렉의 명단’의 약진으로 총리가 됐다. 슬로베니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다.
이탈리아 여당 오성운동을 창당한 베페 그릴로(71)도 코미디언 출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즉석 스탠딩 코미디로 TV 진행자에 발탁돼 1970~80년대 인기를 얻었다. 1986년 TV에서 베티노 크락시 당시 총리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국에서 퇴출되자 길거리 정치토크쇼를 열며 기성정치권에 성역 없는 맹공을 퍼부어 더 유명해졌다. 2000년대 들어선 인터넷으로 무대를 옮겨 촌철살인의 정치평론을 통해 파워블로거로 등극한 뒤 2009년 오성운동을 창당했다. 수도, 교통, 개발, 인터넷 접근성, 환경이라는 다섯 가지 선결과제를 들고 나온 오성운동은 2013년 총선에서 원내 3당이 되는 돌풍을 일으킨다. 2018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인 자신의 좌충우돌 행보가 여론의 과녁이 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오성운동 집권의 디딤돌이 됐다.
코미디언 정치 시대의 함의
이런 코미디언 정치인의 약진을 어떻게 봐야 할까. 2가지 관점이 가능하다. 하나는 ‘정치의 엔터테인먼트화’가 초래한 희비극적 상황이라는 거다. 연예인과 스포츠맨으로 대표되는 유명인이 정치권에 대거 진입하면서 정치의 오락화, 예능화가 심화되고 고전적인 정치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고 우려를 표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대표되는 비판적 관점이다.다른 하나는 다원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기성정치인의 대안으로 유머감각이 뛰어난 코미디언이 부각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다원주의 시대는 자기풍자 능력을 갖춘 정치인을 요구한다. 자신의 약점까지 거침없이 웃음거리로 만들 줄 아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정치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치인들은 자기는 늘 옳고 상대는 악의 화신이라는 유아적 이분법 논리와 승자독식의 정치문화에 젖은 탓에 자기풍자 능력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성정치권에서 대안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코미디언을 통해 이를 충원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본디 유머는 좋은 기질이라는 뜻의 ‘굿 유머’가 줄어든 표현이다. 사람들에게 즐겁고 건강한 웃음을 주기 위해선 타인을 공격하는 웃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지칭한 표현이다. 권력가에게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지만 코미디언에게선 자주 발견되는 미덕이다.
“어떻게 어릿광대를 최고 권좌에 앉힐 수 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 정치학자 클로드 르포르의 통찰을 음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민주주의 최고 권좌는 원래 텅 비어 있다.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인들은 그 자리에 잠시 머무르다 가면서 그 권좌가 영구적으로 채워질 경우의 부정적 효과를 일깨워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 자리가 비어있음을 감춰주는 덮개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