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포스터(상자 안)와 극중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는 장면. [수키컴퍼니]
1991~92년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는 ‘모래시계’(1995)로 정점을 찍게 되는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명성에 날개를 달아준 명작이다. 윤여옥 역의 채시라, 최대치 역의 최재성, 장하림 역의 박상원을 스타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최고 시청률 58.4%, 드라마 OST 40만 장 판매라는 경이적 기록은 이 작품을 보지 못한 세대에게 그 반향을 더듬어보라고 터뜨려주는 조명탄에 불과하다.
한 세대 전 방영된 이 드라마는 시청자의 뇌리와 귓가에 더 애틋하게 남아 있는지 모른다. ‘다시 보기’는 화질이 너무 떨어지는 데다 후시녹음이 많아 추억의 반추를 방해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4월 14일까지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지인우 대본·작사, J.ACO 작·편곡, 노우성 연출)는 관객의 추억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드라마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기대면서 여옥(김지현·문혜원 분), 대치(박민성·김보현 분), 하림(이경수·테이 분)의 삼각관계 중심으로 극을 응축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맡았던 이중스파이 안명지 같은 배역은 사라졌다.
플래시백으로 추억을 파고들다
최대치 역의 박민성, 장하림 역의 이경수, 윤여옥 역의 김지현 [수키컴퍼니]
이때 가장 많이 도움을 주는 장치가 음악이다. 드라마 OST가 워낙 인기 있었던 만큼 귓가에 익숙한 테마 곡을 활용한다면 금상첨화일 터.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 ‘드레스드 투 킬’의 사운드트랙 표절로 판정 난 ‘여옥의 테마’를 비롯해 상당수 곡이 저작권 문제로 쓸 수 없었다. 유일하게 건진 곡은 ‘메인 테마’. 오프닝과 엔딩 장면뿐 아니라 중간 중간 그 곡의 다양한 변주가 울려 퍼진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2막 서울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여옥과 하림 앞에 죽은 줄 알았던 대치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삼중창이다. 3명의 엇갈린 심정이 절절하게 담긴 절창이다. 특히 하림 역을 맡은 배우 이경수의 절창이 돋보인다.
그래도 드라마 속 수많은 에피소드와 장면 중 어떤 것을 택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역시 추억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남파된 대치를 따라 제주 4·3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여옥과 그녀의 변론을 돕는 하림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이런 극 전개는 드라마를 시청한 관객의 추억을 차곡차곡 환기하는 효과까지 낳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지 못한 관객에겐 불친절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시간을 넘나들 때 서로 관련된 장면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 핵심적 키워드는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이다.
광기보다 죄에 초점을 맞추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형상화한 장면. [수키컴퍼니]
이에 따라 드라마 속 버마 밀림에서 악전고투를 거치지 않은 대치는 바로 중국 홍군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상하이에서 좌익 독립운동을 펼치던 그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우익 지도자를 저격하려다 여옥의 아버지이자 중도파 지도자인 윤홍철을 실수로 살해한다. 드라마에선 대치가 아니라 그를 좌익으로 이끈 김기문의 소행으로 그려진 장면이다. 그렇게 다시 대치는 여옥이 가장 아끼는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치와 여옥 사이에 태어난 아들 대운이 드라마에선 6·25전쟁 와중에 미군 폭격으로 숨진 것으로 그려지지만, 뮤지컬에선 제주 4·3사건 기간 진압군의 소행으로 바뀐다. 남파공작원으로 제주 4·3사건의 비극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대치의 혁명사상으로 피붙이를 모두 잃은 여옥은 다시 북으로 넘어가려는 대치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치는 다시 여옥을 버려두고 홀로 도망친다. 그렇게 대치는 여옥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마다 그녀를 버리고 도망간 존재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대치는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돼간다. 뮤지컬은 이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견디기 힘든 슬픔만 안기는 존재로 그려냈다.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대치와 여옥의 최후의 순간, 그것에 대한 죄의식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올 법한데 그 대목이 빠진 점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뮤지컬은 드라마 방영 당시 열광적 환호에 묻혔던 이 드라마의 진가를 재음미하게 해준다. 드라마의 구조적 뼈대를 무대 위에 뚜렷이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여명을 응시하던 눈동자에는 과연 어떤 빛깔, 어떤 감정이 어려 있었던 걸까. 대치의 그것이 핏빛으로 충혈됐다면, 여옥의 그것은 비탄의 눈물로 번져 있고, 하림의 그것에는 회한이 잔뜩 서려 있을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여명은 환희와 희망의 빛깔이 아니었다. 그 건국의 기원에는 피와 눈물과 땀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28년 전 드라마가 진짜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신화학자와 철학자는 말한다. 모든 국가의 기원에는 초석적 폭력이 숨어 있다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에 숨겨진 그 초석적 폭력은 무엇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언급한 ‘친일파’와 ‘빨갱이’가 초래한 핏빛 폭력이다.
친일파가 현실영합적 맹목에 붙은 이름표였다면 빨갱이는 이상주의에 취한 광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자의 폭력이 낳은 비극이 4·3사건이라면 후자의 폭력이 초래한 참극은 6·25전쟁이다. 문 대통령은 ‘빨갱이’란 딱지가 초래한 남한 사회의 폭력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스며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력까지 외면할 순 없다.
초석적 폭력으로서 ‘친일파’와 ‘빨갱이’
무대 위로 올린 400석 규모의 ‘나비석’에서 바라본 배우들의 역동적 연기(왼쪽). 극의 처음과 끝을 수미쌍관으로 장식하는 여옥과 대치의 최후 장면. [수키컴퍼니]
이 뮤지컬은 50억 원의 투자비를 약속받고 오디션과 제작에 들어갔지만 지난 연말 투자사 대표가 잠적하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놓인 바 있다. 하지만 작품성을 안타깝게 여긴 배우들이 출연료를 스스로 깎고 제작스태프가 상당한 비용을 자비로 부담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무대를 줄이고 영상배경을 활용하며 MR(녹음된 음악)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그 대신 400석 규모의 객석을 무대 위로 올려 배우들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체감할 수 있게 했다. 티켓 가격 역시 다른 대형뮤지컬의 절반 이하로 책정했다.
눈썰미 좋은 관객은 이 뮤지컬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다. 원작 드라마 팬은 단단히 응축된 공연을 통해 원작의 심층적 구조를 재발견하고 있다. 뮤지컬 팬은 패기 넘치는 배우들의 가창력과 에너지에 반해 ‘가성비 최고인 뮤지컬’로 꼽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여옥의 넘버를 보강하고 ‘악덕 친일파’ 최두일과 ‘냉혈 빨갱이’ 김기문 같은 주변인물을 입체화하는 발효과정을 좀 더 거친다면 ‘명성황후’나 ‘영웅’ 못지않은 창작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