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이력은 특별했다. 그는 중국 근대사의 격동기에 태어나 14세에 지하 공산당원이 됐다. 여기까지야 시대적 상황이라 해두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그는 이후 진짜 혁명가로 성장해 중국 혁명의 주역이 되지만, 후에 공산당 내에서 우파로 낙인찍혀 문화혁명 때 숙청됐다. 그는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혁명에 충성을 바치려면 문학을 배반해야 한다. 그런데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하자면, 혁명 진영에서 볼 때는 수치스러운 배반자가 된다.”
숙청으로 죽을 고생을 한 사람의 회고치고는 ‘분노’도 ‘격정’도 없이 담담하다 싶은데, 이 담담함은 끝까지 유지된다. 그는 숙청 기간에 신장 위구르 지방의 사막지대에서 16년간 막일을 했다. 스스로는 농부로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 ‘하방’의 결과로 신장 위구르에 갔다면 유배나 다름없는 것이고, 그곳에서 마소와 같은 삶을 살았던 듯하다. 그곳에서는 집필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아 마오쩌둥의 자서전만 학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는 그곳에서 농민으로 살면서 신장어(語)를 공부해 주민들을 가르쳤고 그들과 친구가 됐다. 이후 1979년 복권돼 베이징으로 귀환한 뒤 1985년 중국공산당 전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됐고, 1986년에서 1989년까지 문화부 부장(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문화예술계와 학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저 한 인간의 입지전적인 스토리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2%가 부족하다. 당시 중국에는 그런 지식인과 정치가가 수십만 명은 됐을 것이고 거기에는 덩 샤오핑 같은 사람도, 반대로 린뱌오(林彪) 같은 사람도 있었으며, 그는 그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데 그가 그들과 다른 점은 하방 때도 복권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일관되게 담담하다는 것. 그는 자신의 생애를 영웅적으로 미화하지도 않았고, 이후 어떤 주장도 웅변도 자신의 입을 통해 주절거리지 않았다.

박경철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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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724호 (p12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