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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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달인? 아직 쑥쓰러워요”

문법 위주 영어 공부, 회화나 청취 부족…오랫동안 영어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입력2014-09-29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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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어 달인? 아직 쑥쓰러워요”
    2010년 ‘50代에 시작한 4개 외국어 도전기’(사진) 출간 이후 내 외국어 실력은 종종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 평가되곤 했다. ‘4개 외국어 도전’은 어느새 ‘4개 외국어 정복’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앞서 자세히 밝힌 대로 ‘1년에 4개 외국어 능력 평가시험 도전’에도 한번에 멋들어지게(?) 성공하고 나니, 그 후 자연스럽게 ‘외국어 공부의 달인’ ‘외국어 습득의 신’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많은 사람이 내가 외국어를 잘할 수밖에 없는 어떤 특별한 배경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력이나 현직을 보고 외국어 공부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외국어 공부에 유리한 남다른 환경에 놓였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원서 독해=영어 실력의 착시현상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그 답은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다. 요즘 젊은 세대 처지에서 보면 나는 외국어에 관한한 어쩌면 초라하기까지 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영어부터 얘기해보자. 영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 과목이었다. 한국 학생이라면 지금까지도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 영어 공부 환경은 지금과 너무 달랐다.

    지금은 조기교육이란 명분 아래 어린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 됐지만, 내 경우 1960년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영어를 배울 기회는커녕 주위에서 그런 인식조차 없었다. 더구나 당시는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때로, 드물게 일찌감치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으면 지적 허영에서 비롯된 괜한 사치로 비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중학교 입학시험(당시엔 시험이 있었다)에 합격한 뒤 입학 전 영어 알파벳을 먼저 깨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당시로선 상당한 선행 학습이었다. 그 후 중고교 6년 동안 줄곧 중요 교과목으로 영어를 배웠고, 성적은 늘 상위 그룹에 속했다. 그렇지만 당시 영어 공부 개념은 기껏해야 주어진 문장을 문법 틀에 맞춰 제대로 해석할 줄 아는 것이었다.

    회화나 청취 영역은 아예 없었다. 영어 공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함이었고, 입학시험은 전적으로 독해와 문법 위주 필기시험으로만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마치 수학 공식의 틀에 맞춰 문제를 풀어 나가는 일종의 학문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양인 얼굴이나 영어 회화는 가끔 단체관람하는 미국 영화 속에서 보고 듣는 게 전부였다.

    그런 가운데 고교 시절 외국어 공부가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것은 제2 외국어도 공부했다는 점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제2 외국어로 독일어와 프랑스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했는데, 자연계열이던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일반적인 추세대로 독일어를 선택했다.

    영어 공부도 쉽지 않은 터에 문법 체계가 많이 다른 외국어를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목표로 하던 대학이 제2 외국어 시험을 필수로 요구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2년 원하던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2년간 예과 과정과 4년간 본과 과정에서 영어 원서를 볼 기회가 많았다. 우리말로 된 훌륭한 의학서적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요즘과 달리 번역서조차 충분하지 않을 때였기에 당시가 지금보다 영어 원서를 접할 기회가 오히려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어 공부 방식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영어교재의 빈번한 사용과는 관계없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 실력에는 큰 진전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본과 과정에는 예과 때 있던 영어 수업 자체가 아예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할 양이 많은 것으로 악명(?) 높은 의대 학사 일정을 따르다 보니 영어 공부를 위해 따로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하기도 어려웠다.

    영어 의학서적들은 처음엔 생소한 전문용어들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일단 이들 용어에 익숙해지면 전체 문장 구조 자체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 쉽게 읽힌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어로 된 묵직한 책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영어 구사 능력이 훌륭한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이 생긴 것이다.

    사실 당시만 해도 간단한 영어 회화가 가능한 사람조차 매우 드물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사가 환자기록을 영어로 쓰고 대화 중에 알 수 없는 영어 의학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영어 실력 자체가 높을 것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영어 자체에 대한 감각은 유지

    “외국어 달인? 아직 쑥쓰러워요”

    요즘은 외국어 말하기를 쉽게 익힐 수 있는 자료가 널려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개인 사정으로 전공의 과정에 앞서 군 복무부터 시작하게 됐다. 민통선 근무를 포함해 경기 문산 근처에서 보낸 3년간의 군의관 시절은 학생 때와는 다른 제약이 있었지만 시간 자체는 본과 시절에 비해 여유가 좀 있었다. 어느 정도 여유 시간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영어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방 부대 근처에 영어학원이 있을 리 없고, 요즘처럼 자습용 비디오나 오디오 교재가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의욕은 있었지만 현실적인 여건 탓에 이따금 카세트테이프를 듣거나 서점에서 영어책 몇 권 사서 자습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영어 단어 실력은 향상됐지만 회화 공부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흔히 하는 표현대로 ‘국방부 시계’만 흘러갔다. 군 복무를 끝내고 1981년 모교인 서울대병원 인턴으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여유 시간 없기로 정평이 난 병원 인턴 시절 영어 공부에 할애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인턴을 마치고 선택한 흉부외과 전공의 시절의 사정은 영어 공부에 관한한 더 열악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쩌다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기울이거나, 아니면 무작정 자거나 쉬는 것이 급선무였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영어로 된 전공서적이나 관련 국제 논문을 끊임없이 읽을 수밖에 없어 영어 자체에 대한 기본 감각만은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전공의들이 해외 학술대회를 참관하거나 해외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영어 공부에 대한 현실적 자극은 더는 없었다. 사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안다는 말조차 하기 쑥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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