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핑스톤페스티벌의 밤(왼쪽)과 낮 풍경.
그 하나가 강촌 한 펜션에서 2005년부터 시작한 플로페스티벌이었다. 서울 이태원에 놀 줄 아는 친구들(요즘 말로 힙스터)이 잘 모이는 바가 있는데, 그 운영진이 주최한 이벤트였다. 경춘선 강촌역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한 펜션에 무대가 마련됐다. 관객은 100여 명이 전부였다. 출연진은 해외 인디밴드 한두 팀을 제외하면, 주최 측과 인연이 있는 인디밴드들이 전부였다.
당시 공연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밴드와 친구들이 펜션 뒤뜰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이 잔이 식기 전 적장의 목을 들고 오겠소”라고 말한 관우처럼 홀연히 무대로 올라가 공연하고 돌아왔다. 그러다 피곤하면 아무 방에나 들어가 시체처럼 잠들었다. 다음 날 누군가가 “아, 이렇게 재미있는 건 처음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페스티벌은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2007년 3회를 끝으로 폐지됐다.
2009년 8월 말 버스를 타고 강원도 홍천 시골로 향했다. 직행이 없어 버스를 갈아타고 내리자 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밴을 타고 산을 오르자 공터가 보였다. 흙을 쌓아 만든 간이 무대, 땅을 파서 만든 간이 화장실, 그리고 새벽이슬을 피하려고 만든 행사 천막 몇 개와 관객 200여 명이 전부였다. 곧이어 무명 밴드의 사이키델릭 연주가 시작됐다.
이벤트 이름은 러브 캠프. 2003년 시작한 행사인데 그 사연이 재미있다. 사이키델릭 마니아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던 인물이 있었다. 대형 횟집 주인으로, ‘샌님’ 위주의 사이키델릭 동호회에서 그는 형님 구실을 했고 급기야 자기 별장에서 사이키델릭 마니아와 밴드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펼쳤다.
그러다 화재로 별장이 소실됐는데, 그 이후 러브 캠프는 공터에서 열렸다. 별천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첫 행사 때 30명 남짓하던 관객은 6배 이상 늘었다. 입장료는 꽃 한 송이였고 그 꽃은 무대장식 소품으로 활용됐다. 누가 공연하느냐보다 그런 특이한 곳에서 공연한다는 게 중요했다. 그곳은 음악과 술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최상급의 흥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주최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7월 13일 제주 함덕해수욕장을 찾았다. 올해로 10년을 맞는 스테핑스톤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제주 출신의 문화 기획자들과 한량들이 여는 이 페스티벌도 플로페스티벌, 러브 캠프와 마찬가지로 공연자, 관객 모두의 넋을 쏙 뺐다.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제주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모였다’는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세 페스티벌에 공통점이 있다면 비즈니스의 ‘ㅂ’ 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스티벌은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한다. 세계 유수 페스티벌도 시작은 그런 공동체 의식이었다. 거대 비즈니스 현장이 된 뒤에도 첫 마음을 잊지 않는다. 축제에 비즈니스가 개입하는 순간 축제를 즐기려는 이들은 순식간에 소비자로 돌변한다. 한국의 거대 페스티벌들은 너무 상업화됐다. 페스티벌 기획자들이 한 번쯤 이를 염두에 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