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시귀르로스의 보컬 욘시.
시귀르로스가 세상에 알려진 건 1999년 첫 정규 앨범 ‘A·gætis Byrjun(좋은 시작)’ 이후다. 일렉트릭 기타 줄을 바이올린 활로 비벼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사운드와 신화의 세계에서나 들을 법한 신비로운 구성, 꿈을 꾸는 듯한 보컬 욘시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들의 음악은 단숨에 평단으로부터 주목받았다. 거의 모든 평론가가 그들의 음악을 논리적으로 묘사하길 포기하는 대신 시 같은 문장을 사용했다. 이성의 관습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은 앨범은 물론 노래에도 이름을 전혀 붙이지 않은 ‘( )’를 비롯해 총 5장의 정규앨범을 냈다. 어떤 앨범은 희망차고 어떤 앨범은 더 몽환적이다. 경중의 차이가 있음에도 시귀르로스의 음악은 여전히 언어로 구성될 수 있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소리에 가깝다.
아이슬란드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그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게 된 건 한 편의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세 번째 앨범 ‘Takk...(감사)’가 유럽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그들은 아이슬란드 투어를 계획했다. 공연장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투어가 아니었다.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 휴양지 공터나 폐공장 등에서 사전고지 없이 공연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투어는 2007년 ‘Heima(집)’라는 제목의 DVD로 발매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묘사는 하되 설명은 할 수 없는 그들의 음악을 아이슬란드의 풍광이 있는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공산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에 물가가 턱없이 비싼 나라임에도, 적잖은 음악팬이 아이슬란드를 찾기 시작한 건 8할이 ‘Heima’ 덕분이었다.
필자는 2008년 가을 일본 도쿄에서 처음 시귀르로스의 공연을 봤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을 처음으로 본 몇 주 뒤였다. 나는 이렇게 썼다. “라디오헤드의 공연이 죽기 전 꼭 한 번 봐야 할 공연이었다면, 시귀르로스는 살아 있는 동안 꼭 한 번 봐야 할 공연이었다.” 5년이 지났다. 시귀르로스 내한이 발표됐을 때 전두엽에서 2008년 10월 25일의 모든 순간으로 향하는 되감기 버튼이 눌린 것만 같았다. 5월 19일만 기다렸다. 과연 그때의 황홀경을 다시 체험할 수 있을까.
아니, 틀렸다. 그 이상이었다. 멤버 4명이 다녔던 지난번 투어가 소극장용이었다면 이번 투어는 블록버스터였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됐지만 무대를 둘러싼 장막은 걷히지 않았다. 그 위에 영상이 흘렀고 연주자들의 실루엣이 조명 변화에 따라 그림자놀이를 하듯 커지고 작아졌다. 두 번째 곡 ‘Ny Batteri’ 중간에 커튼이 걷히면서 본격적인 꿈의 여행이 펼쳐졌다. 영상과 조명은 애초부터 음악과 하나였던 듯 장엄하면서도 화려하고 또한 몽환적이었다.
그들은 희로애락과 삼라만상 저편에 있는 심연의 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줬다. 2시간 내내 연주자 10여 명과 관객 6500명의 영혼이 오로라가 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을, 서울 하늘을 부유했다. 환상은 곧 현실이었다. 현실이 곧 환상이었다. 치유를 뛰어넘는 정화, 정화를 뛰어넘는 숭고의 에픽이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뮤지션을 공연장에서 만났다. 다들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 석판을 받아든 모세의 심정이었으리라.
한국 관객은 유달리 ‘떼창’을 좋아한다. 어느 부분을 따라 불러야 하는지 예습까지 해가서 공연장을 ‘싱얼롱(singalong)’ 바다로 물들인다. 내한한 아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도 그때다. 하지만 시귀르로스의 공연에서는 그 어떤 따라 부르기도 없었다. 아이슬란드어 때문 아니냐고? 그들이 영어로 노래하는 밴드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민 80%가 요정을 믿는다는 섬에서 날아온 시귀르로스의 음악에 다른 어떤 소리도 일절 섞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을 본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못 본 걸 억울해해야 하는, 그런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