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 소개하는 자신의 애독서, 혹은 애장서를 보면 ‘이 사람은 진짜 어떤 사람일까?’ 하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경우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두고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이라고 말한 모 의원이나 늘 ‘삼국지’에서 배운다는 모 광역단체장이 그런 경우인데, 어쨌거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분들이 필자의 주소지인 경북 안동시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은 이렇게 독서조차 지극히 ‘정치적’으로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모든 정치인이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미 경험칙으로 깨달은 무언가가 있다. 그들의 프로필에서 독서 항목 정도는 대충 ‘감가(減價)’해서 보고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 이는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상식의 축에 속한다.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 나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애장도서 목록이 필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박 전 대표의 애장도서 목록에는 다름 아닌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까치글방 펴냄)가 선순위로 올라와 있었다. 정치인들이 대외용으로 밝히는 애장도서란 대저 ‘격조가 있어 보이되,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이 ‘있어 보이려고’ 소개할 만큼 대중적이지도 않거니와,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굳이 재독, 삼독하면서 읽을 만한 ‘흥행요소’를 어디에도 품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마키아벨리즘의 향취’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중국철학의 기본정신인 인(人), 중(中), 군(君)의 관점을 시종일관 견지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 펑유란은 베이징대와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중국 최초로 ‘중국인에 의한 중국철학사’(1934)를 완성했다. 물론 이 책은 ‘당대의 성과물’이지만 ‘문화 대혁명’ 때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민주동맹 대표),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등을 지낸 뒤 학문적으로 더 이상의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당대의 성과물’이라는 표현은 필자의 겸손일 뿐, 이 책은 실로 ‘거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철학자(哲學者)’일 뿐 ‘철학사가(哲學史家)’는 아니다”라는 저자의 서문은 후대에 의해 부인됐다. 정작 그의 이름을 빛낸 것은 ‘철학사’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의미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관점’이다.
원래 중국철학을 다룬 책들이 지닌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고증(考證)이었다. 사라진 기록과 전해져온 이야기들을 모두 역사로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배척할 수도 없는 것이 중국철학, 혹은 철학사의 원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펑유란은 ‘거짓된 논점은 버려야 하지만 사료에 내포된 시대적 사상적 맥락은 고찰한다’는 석고(釋古)의 관점에서 책을 썼다. 즉 의심스런 과거는 모두 버린다는 의고(擬古)적 태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배경을 분석하고 담아냄으로써 중국철학의 거대한 줄기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의 많은 이야기를 두고 ‘설화’로 배격하느냐, 그 이야기가 나온 배경과 시대적 맥락에 주목하느냐의 문제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철학에서 많은 부분을 복원했다. 특히 5장과 11장에 걸쳐 다룬 묵자(墨子)에 대한 견해와 12장의 순자(荀子) 부분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다만 중국철학사란 곧 유(儒), 불(彿), 도(道)를 아울러야 한다는 점에서, 저자 스스로도 밝히듯 불가(佛家) 부분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이 책은 한 인간의 노력과 학문, 그리고 통찰에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대작이다. 러셀이나 힐쉬베르거 등의 서양철학사에 비견되는 ‘동양철학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철학사’는 동서양의 철학사를 대대적(待對的) 관점에서 공부하고자 할 경우와, 중국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관통하려는 독자에게 ‘제1의 선택’으로 권해진다. 다만 책의 무게감이 크고, 일거에 완독하기에는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근혜 전 대표 이후 다른 정치인에게서 이 책이 거론되는 것은 앞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정치인들은 이렇게 독서조차 지극히 ‘정치적’으로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모든 정치인이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미 경험칙으로 깨달은 무언가가 있다. 그들의 프로필에서 독서 항목 정도는 대충 ‘감가(減價)’해서 보고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 이는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상식의 축에 속한다.
그런데 어느 인터뷰에 나온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애장도서 목록이 필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박 전 대표의 애장도서 목록에는 다름 아닌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까치글방 펴냄)가 선순위로 올라와 있었다. 정치인들이 대외용으로 밝히는 애장도서란 대저 ‘격조가 있어 보이되,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파격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이 ‘있어 보이려고’ 소개할 만큼 대중적이지도 않거니와,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굳이 재독, 삼독하면서 읽을 만한 ‘흥행요소’를 어디에도 품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마키아벨리즘의 향취’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중국철학의 기본정신인 인(人), 중(中), 군(君)의 관점을 시종일관 견지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 펑유란은 베이징대와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중국 최초로 ‘중국인에 의한 중국철학사’(1934)를 완성했다. 물론 이 책은 ‘당대의 성과물’이지만 ‘문화 대혁명’ 때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민주동맹 대표), 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등을 지낸 뒤 학문적으로 더 이상의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당대의 성과물’이라는 표현은 필자의 겸손일 뿐, 이 책은 실로 ‘거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철학자(哲學者)’일 뿐 ‘철학사가(哲學史家)’는 아니다”라는 저자의 서문은 후대에 의해 부인됐다. 정작 그의 이름을 빛낸 것은 ‘철학사’ 분야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의미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관점’이다.
원래 중국철학을 다룬 책들이 지닌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고증(考證)이었다. 사라진 기록과 전해져온 이야기들을 모두 역사로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배척할 수도 없는 것이 중국철학, 혹은 철학사의 원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펑유란은 ‘거짓된 논점은 버려야 하지만 사료에 내포된 시대적 사상적 맥락은 고찰한다’는 석고(釋古)의 관점에서 책을 썼다. 즉 의심스런 과거는 모두 버린다는 의고(擬古)적 태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배경을 분석하고 담아냄으로써 중국철학의 거대한 줄기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의 많은 이야기를 두고 ‘설화’로 배격하느냐, 그 이야기가 나온 배경과 시대적 맥락에 주목하느냐의 문제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중국철학에서 많은 부분을 복원했다. 특히 5장과 11장에 걸쳐 다룬 묵자(墨子)에 대한 견해와 12장의 순자(荀子) 부분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다만 중국철학사란 곧 유(儒), 불(彿), 도(道)를 아울러야 한다는 점에서, 저자 스스로도 밝히듯 불가(佛家) 부분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이 책은 한 인간의 노력과 학문, 그리고 통찰에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대작이다. 러셀이나 힐쉬베르거 등의 서양철학사에 비견되는 ‘동양철학사’라고도 할 수 있다.
<b>박경철</b>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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