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준 KAIST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장은 2월 28일 ‘마이크론표 HBM3E’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HBM3E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5세대 버전으로, 최근 마이크론이 HBM업계 선두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먼저 양산 소식을 알려 주목받았다. 그동안 마이크론은 업계 후발 주자이자 시장점유율 만년 3위로 평가받았다. 그런 마이크론이 HBM3E에서 치고 나가면서 국내 기업을 턱밑까지 추격한 것이다. 향후 HBM업계에선 차세대 HBM 개발을 둘러싸고 3사 각축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SK하이닉스 충북 청주 공장(위). 삼성전자 경기 평택 공장. [SK하이닉스 제공, 삼성전자 제공]
지난해 HBM3E 직행 승부수
마이크론의 HBM3E 양산은 기존 HBM업계 판도를 바꾸겠다는 승부수로 풀이된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점유율은 SK하이닉스 53%, 삼성전자 38%, 마이크론 9%로 추정된다(그래프1 참조). 이 같은 격차에 마이크론은 지난해 HBM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주류인 HBM3(4세대)를 건너뛰고 HBM3E로 직행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투톱 체제를 구축한 HBM3 대신 HBM3E 분야를 선점해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다.마이크론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 본사 전경. [마이크론 제공]
마이크론이 이처럼 HBM에 속도를 내는 이유는 향후 HBM 시장이 생성형 인공지능(AI) 수요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HBM은 컴퓨터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에 탑재돼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대규모 학습이 기반인 AI 분야에서 핵심 요소인 것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전 세계 HBM 시장 규모가 2022년 19억 달러(약 2조5300억 원)에서 지난해 40억 달러(약 5조3000억 원)로 늘어났고, 2027년엔 330억 달러(약 44조 원)까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그래프2 참조). 반도체산업의 미래 먹거리가 곧 HBM인 셈이다.
삼성, 12단 HBM3E 최초 개발
다만 마이크론이 단기간에 한국 기업을 추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HBM3E 개발 시계도 빠르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마이크론과 같은 사양의 HBM3E(8단·24GB(기가바이트))를 개발하고 올해 1월 엔비디아의 최종 성능 평가를 통과했다(표 참조). 3월 양산에 돌입해 H200 칩과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B100 칩(하반기 출시 예정)에 물량을 조달할 예정이다.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내부 일정표를 이미 짜놓은 것이다.일각에선 마이크론의 등장으로 SK하이닉스 독주체제가 깨진 것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반응이 나온다. 어차피 폭증하는 HBM 수요를 SK하이닉스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국내 HBM업계 한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이미 올해 HBM 완판을 선언했다”며 “생성형 AI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HBM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어 SK하이닉스 생산량만으로는 시장이 원하는 물량을 전부 조달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마이크론이 엔비디아에 HBM3E를 납품한다고 해서 당장 SK하이닉스 수익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는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를 동시에 상대하기 위해 기술 격차를 벌리려는 모습이다. 마이크론이 HBM3E 양산을 발표한 직후 삼성전자는 HBM업계 최초로 12단·36GB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의 HBM3E는 8단·24GB인데, 그보다 고용량인 제품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삼성전자 측은 “AI 서비스가 고도화하고 데이터 처리량도 급증하고 있다”며 “(자사 제품이) 고용량 솔루션을 원하는 고객사 니즈에 가장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해당 제품 샘플을 고객사에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상반기 중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고성능·고수율·고수익 관건”
HBM업계가 지각변동을 겪고 있는 가운데 최종 승자를 가릴 키는 결국 엔비디아가 쥐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엔비디아는 글로벌 GPU 시장을 사실상 독식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AI용 GPU 시장점유율은 엔비디아가 80%, AMD가 20%다. 이에 HBM 기업 입장에선 엔비디아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납품처’로 여겨진다. 엔비디아 손을 놓치는 순간 죽고, 잡는 순간 살게 되는 셈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국내 기업은 HBM3E는 물론, 2026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6세대 HBM(HBM4)에서도 엔비디아와 더 가까이 밀착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HBM업계 한 관계자는 “향후 엔비디아의 선택이 HBM업계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될 것”이라며 “지금은 HBM 생산량이 시장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향후 생산 수준이 안정되면 성능에 대한 엔비디아의 눈높이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고성능 HBM 제품을 개발하는 동시에 누가 더 나은 수율로, 더 많은 수익을 내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이슬아 기자
island@donga.com
안녕하세요. 주간동아 이슬아 기자입니다. 국내외 증시 및 산업 동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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