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흔들리는 한국 게임산업

붕어빵엔 붕어 없고 넥슨 성장史엔 게임 없다

‘바람의 나라’ 출시 20년, 한국 게임산업의 상징…개발보다 M&A 치중, ‘오너리스크’로 휘청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08-12 16: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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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J는 사업가예요. 좋은 게임 만드는 것보다 회사 키우는 데 더 신경 써온 사람이죠. 그가 이런 비리에 연루될 줄은 몰랐지만, 게임업계 사람들은 전부터 넥슨을 우리나라 대표 게임회사라 부르는 데 불만이 많았습니다.”

    한 게임개발자가 한 말이다. ‘JJ’는 김정주 NXC(넥슨 지주사) 회장을 가리킨다. 그는 만 26세 때인 1994년 초기자본 6000만 원으로 넥슨을 세웠다. 이후 20여 년 만에 이 회사는 매출 2조 원대 글로벌 기업이 됐다. 지난해 말 기준 매출액과 수익 면에서 우리나라 게임업체 중 압도적  1위다. 그런데도 업계 관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건 넥슨을 상징할 만한 ‘대표선수’가 없어서다.



    ‘바람의 나라’ 이후 인수합병에 치중

    “1996년 ‘바람의 나라’를 내놓았을 때는 분명 넥슨이 우리나라 게임산업의 미래였어요. 모뎀이 주요 통신수단이던 시절 세계 최초로 ‘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MMORPG·온라인으로 연결된 여러 플레이어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즐기는 게임)’을 상용화했으니까요.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넥슨은 개발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주로 초대형 인수합병(M&A) 소식으로 관심을 집중시켰죠.”

    앞서 그 게임개발자의 얘기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며 넥슨의 오늘을 만든 게임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서든어택’ 등은 모두 다른 게임회사가 개발한 것이다. 넥슨은 시장에서 해당 게임회사들과 게임들을 사들였다. 김 회장은 두둑한 배짱과 승부사 기질로 한 번에 최고 수천억 원이 오간 이들 ‘빅딜’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08년 ‘던전앤파이터’ 개발사 네오플을 3852억 원에 인수한 결정은 한동안 화제가 됐다. 막대한 금액 탓에 우려하는 이가 적잖았지만 김 회장이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넥슨은 그 무렵 자체 개발한 게임 ‘제라’의 실패로 성장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런데 ‘던전앤파이터’가 중국에서 ‘국민 게임’으로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모으며 해외 매출이 급성장했고, 그 덕에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게임회사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후에도 넥슨은 ‘군주온라인’을 개발한 엔도어즈, ‘서든어택’을 개발한 게임하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다(표 참조). 이와 동시에 업계에서는 ‘국내 1위 업체가 게임 개발에는 투자하지 않고 돈 벌 생각만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서는 김 회장이 창업 초창기부터 ‘개발’보다 ‘사업’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그가 서울대와 KAIST(한국과학기술원) 대학원에서 공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기술보다 경영 쪽에 좀 더 관심과 재능이 있었다는 얘기다. 반면 김 회장의 대학, 대학원 친구로 넥슨을 공동창업한 송재경 XL게임즈 대표는 달랐다고 한다. 일찍부터 ‘개발 천재’로 불리던 그의 머릿속에서 ‘바람의 나라’ 아이디어가 태어났다는 건 업계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난해 ‘스물한 살 넥슨의 자서전’이라는 설명과 함께 출간된 책 ‘플레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KAIST 대학원 재학 시절 함께 게임회사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창업 초기 김 회장은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해 기업 홈페이지와 인트라넷 등을 구축해주는 웹에이전시 사업에 더 주력했다. 게임 개발은 송 대표의 몫이었다. 이 책은 이런 김 회장을 ‘게임 마니아라기보다 비즈니스 마니아였다’고 평했고, ‘김정주가 웹에이전시 사업을 키워가는 동안 송재경은 바람의 나라를 만들고 있었다. 송재경을 비롯해서 몇몇 개발자들이 밤낮으로 작업을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다 의견 충돌이 빚어지면서 송 대표는 1995년 말 넥슨을 떠났고, 이후 ‘바람의 나라’는 정상원 넥슨 부사장 등 다른 개발자들에 의해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개발자한테도 안 주던 주식을…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 중·후반은 세계적으로 컴퓨터 기반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때다. 국내외 굴지의 기업들이 하나둘 온라인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 무렵 관련 분야를 접한 젊은 천재 중 상당수가 넥슨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다 컴퓨터에 빠져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정 부사장도 그중 한 명이다. 채팅조차 신기술로 인정되던 시대에 그래픽 온라인게임을 만들어낸 넥슨은 당시 ‘기술혁명’의 산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넥슨은 자체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어둠의 전설’ ‘일랜시아’ 등 후속 MMORPG도 계속 내놨다. 한 게임 개발자는 “당시 넥슨은 매년 새로운 게임 타이틀을 내놓는 우리나라 유일의 게임회사였다. 그 덕에 업계 실력자들이 다 넥슨으로 모여들었고, 좋은 게임이 계속 개발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회고했다. 이는 2001년 ‘크레이지 아케이드 BnB’, 2004년 ‘크레이지 레이싱 카트라이더’(카트라이더) 등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개발자들이 하나둘 ‘제2의 송재경’이 되면서 넥슨이 슬슬 ‘불임기업’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2004년까지 넥슨의 게임개발 업무를 총괄하던 정 부사장도 그해 대표 자리를 내놓고 회사를 떠났다(그는 2013년 재입사했다).  

    “2000년 엔씨소프트가 코스닥에 상장한 게 출발점이었어요. 이후 게임업체들이 속속 기업을 공개했고, 주식을 받은 개발자들은 회사 수익을 나눠 갖게 됐죠. 벤처 붐이 불 때니까 사실상 돈방석에 앉은 거예요. 그런데 넥슨은 ‘아직은 안 된다’며 계속 상장을 미뤘습니다. 그 때문에 불만을 품은 개발자들이 줄줄이 사표를 썼고, 이를 막아보려던 정상원 당시 대표가 김 회장에게 담판을 지으러 갔다 결국 대표직까지 내놓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게임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그 무렵 이름난 게임업체 가운데 상장하지 않은 회사는 넥슨뿐이었다. 그러나 넥슨의 영광을 함께 일군 개발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나도 김 회장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 대신 게임 개발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회사를 사들였다.

    그리고 최근 김 회장이 같은 시기 다른 데도 돈을 썼음이 밝혀졌다. 진경준 당시 검사에게 비상장주식을 공짜로 선사한 것이다. 검찰은 김 회장이 진 검사에게 자사 주식 매입자금 4억2500만 원을 주고, 11차례에 걸쳐 여행경비 5000여만 원을 지급했으며, 차량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각종 편의도 봐줬다고 밝혔다. 이런 돈 거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가 바로 2005년이다. 넥슨이 2011년에야 비로소 일본 도쿄 증시에 기업을 상장하면서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진 검사가 확보한 넥슨 지분은 0.23%에 달한다. 박지원 넥슨코리아 대표(0.12%)의 2배 수준이고, 넥슨에 막대한 돈을 벌어다 준 게임 ‘카트라이더’ 개발자 정영석 씨(0.28%)와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다. 반면 ‘바람의 나라’를 함께 만든 송재경 대표와 정상원 부사장이 보유한 주식은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인 기업의 미래

    이에 대해 김환민 게임개발자연대 사무국장은 “넥슨이 개발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동안 기업 보호와 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며 “김 회장이 기업 상장과 주식 배분 같은 문제에 얼마나 예민하게 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모두 이번 언론보도를 보고 많이 놀랐다”고 밝혔다.

    또 하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김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넥슨의 수직적 지배구조다. 김 회장이 진 전 검사에게 돈을 주기 시작한 2005년, 넥슨은 물적 분할을 통해 투자 부문인 넥슨홀딩스(현 NXC)와 게임사업 부문인 넥슨으로 분할됐다. 이 중 NXC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김 회장과 부인 유정현 감사가 주식의 96.9%를 갖고 있는 비상장회사다. 이 회사가 넥슨(일본 상장법인) 지분 57.8%를 소유하고, 넥슨이 다시 넥슨코리아, 넥슨유럽, 넥슨아메리카 지분 100%를 보유하는 형태로 김 회장은 이 모든 기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넥슨코리아 아래에는 다시 네오플, 엔도어즈, 넥슨네트웍스, 넥슨커뮤니케이션즈 등이 있다. 김 회장이 최근 진 전 검사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넥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NXC 회장직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룹 전체에 미치는 그의 지배력은 줄어들지 않은 상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연매출이 수조 원대에 이르는 국내 기업 가운데 1인 지배체제가 이토록 공고한 기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김 회장과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이자 KAIST 대학원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의 경우 김 회장과 비슷한 시기 네이버를 창업해 업계 1위 기업으로 일궜지만 현재 그의 주식 지분율은 4.6%에 불과하다. 이 의장은 최근 “경영권은 돈이 아니라 실력과 열정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발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에 대해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팀장은 “벤처 분야에서는 기업이 성장한 뒤 창업 위험을 함께 감수한 동료들과 과실을 나누는 게 일반적이다. 그 방식이 바로 주식 배분”이라며 “게임업계 사람들이 김 회장에게 실망한 것은 자신의 경영권을 지키려고 회사에 크게 기여한 동료들에게조차 지분을 충분히 나눠주지 않던 그가 권력자에게는 막대한 자산을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넥슨의 정식 이름은 ‘넥스트 제너레이션 온라인 서비스’다. 김 회장은 20여 년 전 ‘개발천재’ 친구와 함께 설립한 이 회사를 통해 우리나라 게임산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그동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바람의 나라’ 출시 후 꼭 20년이 흐른 지금, 넥슨이 킬러 콘텐츠 부재와 오너리스크의 위기를 딛고 또 한 번 ‘희망의 이름’이 될 수 있을지 많은 이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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