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이 도로 민주당으로 가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내부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반대론이 잇달아 나오는 데 대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직설적인 불만 토로다. 자신이 당을 바꿔놓았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8월 27일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가 선출되면 물러날 김 대표지만, 특유의 소신 행보는 여전하다. 자신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마뜩지 않은 것이다.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김 대표가 어떤 지점에 서 있을지를 예감케 하는 장면들이다.
김 대표가 말한 ‘도로 민주당’에는 아마 ‘친노(친노무현)’ ‘이념’ ‘계파’ ‘중구난방’ 같은 키워드가 담겨 있을 테다. 그동안 김 대표가 지향해온 방향을 돌아보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말들이다. 문제는 김 대표식 사고대로라면 그 한복판에 문재인 전 대표가 위치하게 된다는 점이다. 애당초 김 대표가 더민주에 들어온 것은 문 전 대표가 내민 손을 잡았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두 사람의 관계는 내년 대통령선거(대선)까지 내다본 동반자 관계로 인식됐다. 문 전 대표가 안고 있는 확장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김 대표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文과의 결별…‘킹’은 불가능
그러나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공천파동을 거치면서 가시화된 두 사람의 불신은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시는 단둘이 보지 않겠다”는 김 대표의 말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 가버렸는지를 설명해준다. 공천과정에서부터 자신을 공격하며 흔들어대던 중심 세력이 문 전 대표 쪽 사람들이라는 게 김 대표의 의심이다. 유기체 같은 정치판의 속성상 단언할 수 없지만, 김 대표와 문 전 대표의 동반자 관계는 일단 끝났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문 전 대표는 김 대표가 제한된 구실만 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으로 흥선대원군이 되기를 원하는 김 대표의 욕구가 충족될 리 없다.무엇보다 접점을 찾기 어려운 대목은 문 전 대표가 과연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 차이다.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나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면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문 전 대표 측 판단과 달리, 그동안 김 대표는 ‘문 전 대표로는 승리하기 어렵기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속내를 여러 차례 드러낸 바 있다.
그렇다고 최대주주인 문 전 대표를 제치고 김 대표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는 꿈은 애당초 무모한 그림이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한때나마 김 대표가 ‘킹메이커’가 아닌 ‘킹’을 심중에 두고 있다는 관측이 나돌았다. 실제로 3월 김 대표는 “킹메이커는 더는 안 할 것”이라 말했고, 이는 ‘대권 도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의 파워가 절정을 이루던 3월 무렵만 해도 그런 추측은 무리한 그림만은 아니었다. 총선을 앞두고 김 대표가 ‘셀프 2번 공천’을 하고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비례대표 공천 명단에 대거 포진하려 했을 당시만 해도 셀프 대선후보를 염두에 둔 행보로 해석되기도 했다. 20대 총선에서 김종인 사단을 구축해 총선 이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는 꿈을 갖고 있으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였다. 이제와 돌아보면, 혹시 그런 꿈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김종인의 착각’이었다. 그가 한때나마 ‘차르’ 소리를 들을 만큼 힘을 보유했던 것은 문 전 대표 측의 전략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자신의 힘이 아니고, 문 전 대표 측이 지지를 철회하는 순간 무너지게 될 일장춘몽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8·27 전당대회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된 이후 김 대표의 정치적 힘은 현저히 빠져버렸다.
이런 마당에 김 대표가 ‘킹’이 되려는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김 대표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더민주 대선후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선후보가 되려면 당연히 경선이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당내 독자적인 지지 기반이 없는 김 대표가 무슨 수로 경선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설령 문재인 대세론이 무너지는 상황이 온다 해도 더민주 안에는 이미 차순위 주자가 여럿 있다. 당내 비(非)문재인 세력도 힘을 모아 김종인을 대선후보로 만들 이유가 없다. 경선을 통해 대선후보 자리를 쟁취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김 대표에게 ‘킹’은 부질없는 꿈일 뿐이다.
적어도 文은 아니어야 한다?
김 대표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런 욕심은 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간 듯하다. 그동안 김 대표는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김부겸 의원, 손학규 전 상임고문 등과 접촉해 대선에 나설 것을 권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의 이 같은 행보에는 단지 판을 키우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실려 있다. 김 대표는 그동안 더민주 대선후보와 관련해 이런 얘기들을 해왔다. “더민주 대선후보는 아직 결정 난 것이 아니다.” “전국적 지지를 받는 인물이 후보가 돼야 한다.” “내년 초쯤 혜성 같은 후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 말들을 종합해보면 김 대표는 문 전 대표가 아닌 다른 후보가 ‘혜성처럼’ 등장할 때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러한 ‘혜성’을 만들어내는 구실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의 손을 잡고 더민주에 들어온 김종인. 이제는 그가 문재인이 아닌 다른 후보감을 찾는 데 앞장서는 장면이 전개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그 과정은 반(反)문재인이라는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같은 김 대표의 도발적 기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대표 자리에서 내려온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 또한 문재인 너머를 꿈꾸는 다른 주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더민주 안에 있을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그 거사가 성공한다면 김 대표는 혜성을 만들어낸 주역이 되겠지만, 실패로 끝난다면 다시 문 전 대표와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군색한 처지에 내몰릴지 모른다. 아니, 그 지경이 되면 그의 존재는 더는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과는 다른 꿈을 꾸며 자신이 권력이 되려 했다 실패한 김종인. 그가 비주류를 거점으로 ‘킹메이커’가 되는 길도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