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와 토양이 지나치게 좋은 것이 화근이었다. 기름진 땅에서 질보다 양으로 마구 생산하니 포도 수확량만 많고 맛과 향이 고급스럽지 못했다. 뜨거운 태양 때문에 포도 당도가 너무 진해 와인이 지나치게 무겁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것도 문제였다. 결국 풀리아 와인은 벌크와인(bulk wine)으로 팔려 가벼운 와인의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블렌딩 재료가 되거나 베르무트(Vermouth·와인에 증류주를 섞고 약초와 향신료 등을 침출한 술) 원료가 되기 일쑤였다.
1980년대 말 유럽연합(EU)은 와인 생산량을 조절하고자 포도밭을 다른 농지로 전환하면 보상금을 주는 정책을 폈다. 이때 풀리아의 포도나무들이 무수히 뽑혀 나갔는데 안타깝게도 축출된 대부분이 귀한 토착 품종이었다. 생산자로선 기르기 힘들고 수확량이 적은 토착 품종보다 박리다매라도 수익을 보장하는 저급 품종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0년대 초 다행히 풀리아 전통 와인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비자가 다양한 와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라져가던 풀리아 토착 품종에 기사회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
풀리아 와인의 고급화를 이끈 두 품종은 프리미티보(Primitivo)와 네그로아마로(Negroamaro)다. 미국에서는 프리미티보를 진판델(Zinfandel)이라 부르는데 미국산 진판델 와인이 적당한 무게감에 마시기 편한 스타일인 반면, 이탈리아산 프리미티보 와인은 묵직하고 무화과나 블루베리 같은 검은 과일향이 진하다. 네그로아마로 와인은 질감이 부드럽고 농익은 자두와 라즈베리향, 계피의 매콤함이 매력적이다.

풍부한 과일향, 부드러운 질감, 묵직한 무게감. 풀리아 와인은 우리가 좋아하는 와인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피자나 파스타, 삼겹살이나 목살 구이처럼 소박한 안주에 와인 한 잔 곁들이고 싶다면 풀리아산 프리미티보나 네그로아마로 와인을 선택해보자. 가격 대비 훌륭한 품질이 최대의 만족을 선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