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오후 ‘공무원연금개혁을 위한 국민대타협기구’(대타협기구) 회의장에서 이근면 인사혁신처장이 한 발언이다. 이 처장은 박근혜 정부 초대 인사혁신처장으로 공무원연금 개편 담당자다. 정부 대표로 대타협기구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개인 의견’을 전제로 공무원연금 수정안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다음 정부와 미래 세대를 위해….”
지난해 11월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를 만나 공무원연금 개혁안의 연내 처리를 당부하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은 10월 28일 국무회의에서도 “국가 혁신 차원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에) 정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금년 내에 마무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2월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공무원연금 개혁은 답보 상태다. 심지어 정부는 공식적인 개혁안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여야는 지난 연말 합의를 통해 4월 안에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만들고, 늦어도 5월 초까지는 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월 8일 여야 의원과 정부 담당자, 이해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대타협기구가 출범했다. 그러나 1월 열린 세 차례 회의 참석 후 야당 쪽에서는 “5월 합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나온다. 한 야당 관계자는 “정부는 계속 정치권이 합의해 공무원연금을 개혁해달라고 주문만 한다.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돼도 법안 작업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현재 상황을 보면 정부가 5월 법안 통과 의지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말로는 개혁 독촉, 정부안은 깜깜
2014년 10월 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후문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충재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앞줄 왼쪽) 등 지도부가 정부 여당의 개혁 방안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삭발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지난해 10월 소속 의원 전원 발의로 국회에 제출한 ‘공무원연금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논의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완성본이다. 이 처장은 2월 5일 대타협기구 회의에서 ‘재직공무원의 연금 수령액을 새누리당 안보다 높이고 퇴직금은 덜 주는’ 내용의 수정안을 발표했지만, ‘정부 공식안’이냐는 질문을 받고는 또 한 번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박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연금 개혁 의지를 밝힌 건 2013년부터. 박 대통령은 그해 7월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오찬에서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을 합리적인 방향으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며 제도 개편을 시사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현행 공무원연금 체계를 유지할 경우 발생하는 막대한 재정적자 등을 수차례 문제로 지적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공무원 수가 늘고 수령기간이 길어지면서 공무원연금 적자액이 급증하고 있다. 정부가 이를 메우기 위해 쓰는 보전금은 2001년 599억 원에서 2013년 1조9982억 원으로 늘었다. 연금 수령자 수도 1982년 3만7000명에서 2013년 363만 명으로 98배나 많아졌다. 지난해 10월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매달 300만 원 이상의 연금을 받는 퇴직 공무원 수가 2012년 말 기준 5만6205명에서 2014년 8월 말 현재 7만5036명으로 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무원연금이 다음 세대에 부담을 넘기는 ‘시한폭탄’이자 ‘밑 빠진 독’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이 ‘적폐’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구체적인 의견을 내놓지 않는 이유에 대해 정부는 “자체적으로 개혁안을 마련하면 ‘셀프개혁’ 논란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공무원의 사용자로서 사실상 공무원연금의 이해당사자인 정부가 직접 개혁안을 마련하는 것보다 여야 합의를 통해 연금 체계를 개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해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정부가 2007년 12월 공무원노조와 맺은 단체협약 제39조에는 ‘정부는 공무원연금제도 개선 시 이해당사자인 조합과 공직사회의 의견을 수렴해 최대한 반영하도록 노력한다’는 조항이 있다. 정부가 ‘정부안’을 내놓으려면 노조와 협의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 과정을 피하고 최대한 빨리 공무원연금법을 개정하려고 여당을 이용해 편법을 쓰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2014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공무원연금 개혁안 정책 간담회’에서 나성린 정책위 수석부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도 수월치 않다는 점이다. 당장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교원단체총연합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한국노총연금공동대책위원회, 사학연금공동대책위원회 등 50개 공무원연금 관련 단체가 모인 ‘공적연금 개악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공투본)가 공무원연금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고, 야당도 사회적 합의가 없는 법개정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를 이유로 새누리당의 개정 법안에 대한 협의 자체를 거부하면서, 결국 정부가 강력히 추진했던 2014년 내 공무원연금 개혁 처리는 무산됐다. 그 대안으로 지난해 12월 10일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가 만나 합의한 것이 대타협기구와 ‘공무원연금개혁 특별위원회’(특위)를 각각 설치해 투트랙으로 공무원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대타협기구에는 여야 의원 4명과 여야가 각각 4명씩 추천한 외부 전문가 8명, 공무원연금 관련 정부부처 담당자 4명, 그리고 공무원노조 대표 4명 등 20명이 위원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이들이 90일간 공무원연금 개혁 방안을 논의한 뒤 합의안을 여야 의원 14명으로 구성된 특위(활동기간 100일, 1회 25일 연장 가능)에 제출하면, 이곳에서 법제화 작업을 거쳐 5월 초 공무원연금 개혁을 마무리한다는 게 현재 정치권의 계획이다.
대타협기구 공동위원장을 맡은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과 새정치연합 강기정 의원은 1월 6일 국회에서 만나 8일 대타협기구 전체회의, 12일 특위 전체회의를 열기로 정하면서 ‘대타협기구에서 (연금개혁) 합의안을 도출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대타협기구가 합의안 도출에 실패할 경우 대처 방식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다. 새누리당은 특위가 최종 결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인 반면, 새정치연합은 대타협기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쪽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1월 22일 열린 대타협기구 전체회의에서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두 기구 사이의 역학관계가 주된 논제로 등장했다. 일부 위원이 “대타협기구가 형식적인 들러리 기구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다. 야당 몫 전문가인 정용건 국민연금바로세우기국민행동 집행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2개의 기구를 만들어놓고 하나의 기구에서 (합의가) 안 되면 나머지 기구를 통해서 압박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대타협기구 정신에 맞지 않는다”며 대타협기구를 중심으로 연금개혁 논의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공무원노조 대표로 대타협기구에 참여한 김성광 공투본 공동집행위원장도 “대타협기구에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특위는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 특위도 논의를 진행하면 대타협기구에서 단일안을 만들기 위해 하는 노력이 의미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결국 논의의 효율을 위해 만든 투트랙 가운데 특위 기능은 사실상 ‘멈춤’ 상태가 됐다.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하면 넘어야 할 산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여당 몫 전문가인 김용하 순천향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지난해 한국연금학회장으로 공무원연금 개편안 초안 작업을 주도했다가 공무원노조 등의 반발에 부딪쳐 사퇴한 인물이다. 역시 여당 쪽 전문가인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으로 이른바 보수 인사로 불린다. 반면 야당 몫 전문가인 정용건 국민연금바로세우기국민행동 집행위원장, 정재철 민주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등은 진보적 시민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이해당사자인 공무원단체와 정부·여당 간 의견 차도 상당하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공무원연금 개혁안의 골자는 공무원들이 앞으로 ‘더 내고 덜 받게’ 하겠다는 것. 국민연금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공무원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60세에서 65세로 늦추고, 2016년부터 신규 임용되는 공무원은 국민연금과 같은 수준의 연금을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미 연금을 받고 있는 퇴직 공무원 중 고액 연금자의 연금액도 동결하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현재 평균 연금액 약 219만 원의 2배인 438만 원 이상을 받는 특히 공무원은 2016∼2025년 연금 수령액이 동결된다. 정부가 전액을 출연·출자한 공공기관에 재취업한 공무원에게는 취업 기간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공무원연금개혁을 위한 국민대타협기구’ 첫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이에 대해 공무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무원연금은 국가인 사용자가 근로관계를 기초로 설계한 사회보장제도며, 국민연금은 강제저축을 통해 기본적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일반 사회보장제도다. 도입 목적과 가입 대상, 운영 방법이 다른 것”이라는 의견이다. 공무원노조 관계자는 “현재 일반직 공무원의 보수는 9급 초임연봉 1900만 원이 말해주듯 100명 이상 민간기업 대비 77.6%에 불과하고, 퇴직금(퇴직수당)도 39%밖에 안 된다. 또 공무원연금에는 재직 중 영리행위와 겸직이 금지되고,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없으며,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도 제한받는 공무원이 퇴직 후 각종 불이익을 보상받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고성규 한국납세자연맹 부회장은 “문제는 현행 공무원연금제도가 운영되는 한 적자 보전을 위해서 누군가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점”이라며 “개혁이 늦어지는 만큼 부담이 늘어난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11월 새정치연합 주관으로 열린 ‘공적연금의 합리적 개편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전문가들 또한 “현행 공무원연금제도 개혁은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적으로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한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된 셈이다. 다만 이해관계자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모으는 데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양준모 교수는 대타협기구 첫 회의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이 늦어질수록 국민이 부담해야 할 세금이 늘어난다. 새누리당이 내놓은 개정안에 따른다 해도, 법 시행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이자가 30억 원씩 나간다”며 최대한 빠른 결론을 내릴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소 늦어지더라도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연구교수는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과 민간에 비해 낮은 공무원 보수 수준 등을 언급하며 “공무원연금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확대해 정부 재정을 안정시키며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노무현 정부 당시 논의된 국민연금의 목표 보장 수준인 ‘소득 대체율 50%’를 공무원연금에 적용하고 현재 40%(40년 가입 기준)로 깎인 국민연금 소득 대체율은 올리는 방안이다. 소득 대체율이란 전 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을 뜻한다. 현재 30년 납부 기준으로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각각 30%와 57% 수준이다.
김인재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현재 공무원연금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공무원연금의 핵심 기능인 사회보장 기능 측면보다 정부재정 부담 측면이 과도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정부재정 부담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현재와 미래 세대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실현을 위한 적정한 노후소득보장제도의 재편, 재설계라는 측면도 고려해 공무원연금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2월 3일 국무회의에서 또 한 번 “미래 세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공무원연금 개혁은 반드시 감수할 수밖에 없는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재의 무정책, 무계획, 무동력 상황이 이어지는 한 이 목표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현재 대한민국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공적 연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씨와 함께 D-day가 표시돼 있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선거일, 2017년 19대 대통령선거일이다. 당장 올해 하반기만 돼도 내년 총선을 신경 써야 하는 정치권이 이해집단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정부가 ‘골든 타임’ 안에 공무원연금 개혁을 이룰 수 있을지 많은 이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