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교과서포럼은 좌편향적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개선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
필자가 사학과를 다닐 당시 한국사 분야에선 현대사를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았다. 동(同)시대는 역사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묘한 논리 때문이었다. 수업과 연구 범위도 대부분 구한말로 끝났다. 한국사에서도 매우 늦게 근현대사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으니, 국내 한국사학계에서 첫 현대사 분야 박사가 나온 것은 1993년에 이르러서다. 이후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당연히 연구 축적의 기간도 짧고 깊이도 얕았다.
분단사관과 수정적 시각차하순, 최정호, 유영익 교수 등이 한국현대사를 전혀 연구하지 않고 교육하지 않는 점을 걱정해 1980년 ‘계간 현대사’라는 학술지를 간행,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학술지 창간호는 6·25전쟁에 대한,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논의를 모아놓는 등 선구적 구실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지만, 불행히도 “현대사를 연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불순하게 여기던 전두환 정권이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폐간해버렸다. 창간호가 폐간호가 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 한국사학계에서는 현대사 연구 및 교육을 하지 않고, 현대사 연구에 대한 진지한 노력은 정부가 차단하는 사이, 그 틈새를 메운 것이 재야와 운동권이다. 1980년대 강만길 당시 고려대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사학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여기서 비롯한 분단체제론 또는 분단사관(史觀)에 따라 한국현대사를 보면 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체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정통 학자가 아닌 재야학자들과 운동권 인사의 저작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분단체제론과 맞물리게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고(故)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저서들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며 현대사를 수정(修正)적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는 1980년대 이전에도 표출되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수정주의 역사관이 지식인 사회와 대학가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80년대였다.
역사학 내부의 교류 단절‘한국전쟁의 기원’을 저술해 국내 좌파 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2005년 10월 31일 국내의 한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런 역사관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허용된 공식적인 관변 논리와는 ‘다른’ 시각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힌 공도 있지만, 이후 한국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왜곡,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큰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런 조류에 감화받은 젊은 세대가 한국사학계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고 본다.
해방 후 식민지 체제에서 탈피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민족주의 교육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나타났다. 국가와 민족을 혼동하는 폐쇄적 민족주의가 뿌리박힌 점이 그것이다. 한국의 국사교육은 역사 인식의 주체를 국민 혹은 국가가 아닌 민족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민중적 관점을 강조했다. 그 결과는 한편으론 폐쇄적·복고적 민족주의, 다른 한편으론 마오쩌뚱주의에 영향을 받은 좌파적 민족주의로 귀결됐다.
또한 한국은 역사학과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눈 거의 유일한 국가다. 심지어 국사학과만 있는 대학도 있다. 그 결과 같은 역사학 내부에서도 교류가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 학문은 학문 간 통섭을 중시하는 데 비해 한국 사학계는 역사학 내부에서도 벽을 쌓고 있다. 국사학계 일부에서는 서양사나 동양사와 교류도 없이 한국사라는 좁은 틀 안에서만 연구를 진행하는 셈이다. 한국 근현대는 좋건 싫건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도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과 서술이 무시되고 있다. 즉 폐쇄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에 빠져버려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사 부분에서는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서술,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북한 체제에 대한 우호적 서술도 나타났다.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80년대 운동권의 이론지침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일선 역사교육 현장의 편향성도 심각한 문제다. 한때 가장 문제 많고 편향된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높은 채택률을 보였던 것은 그런 서술이 교사들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중등 교원이 대학 시절 배우고 체득했던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현대사는 적어도 자유민주주의적 근대 국민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정도는 살펴봐야 하는데도, 그런 탐색은 찾기 힘들다. 예를 들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도 교과서에서 거의 다루지 않고, 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도 간과되는 경우마저 있다. 유엔 총회에서의 국제 승인은 국제법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며, 대한민국과 북한의 가장 큰 차이인데도 이러한 내용이 빠진 상태에서 현대사 교육이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현대사 교육을 올바르게 하려면 먼저 집필 기준을 세심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새로 나온 사료와 자료, 즉 비밀 해제된 자료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업데이트해 집필 기준에 충실히 포함해야 한다. 현 기준은 1980년대식 기준에서 여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행 일부 교과서는 분단 책임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미국, 남쪽에 있는 것처럼 서술한다. 이 전 대통령의 정읍 발언을 근거로 그렇게 썼는데, 새로 나온 옛 소련의 자료를 보면 단정(單政) 및 분단은 소련 독재자 스탈린과 북쪽이 먼저 기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집필 기준을 새롭게 세우지 못하니까 교수나 교사들이 멋대로 자신이 아는 것만 쓰고 강의하며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 역사는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고 상처투성이였다. 미화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이룩했다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완전했던 존재가 아니라, 건국 이후 진정한 근대 국민국가로 완성돼가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도 계속 발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이기에,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우리 입으로 일제 식민통치 미화, 日 우익 환호
| 9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카페 산다미아노에서 교학사를 제외한 7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 협의회원들이 ‘법 절차를 무시하는 한국사 재검정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준식 연세대 연구교수 junsik@yonsei.ac.kr
일본 후소샤(扶桑社) 교과서가 나왔을 때 ‘위험한 교과서’라는 별명이 붙은 적이 있다. 일본 청소년의 역사의식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므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후소샤 교과서는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이 정당했다고 호도하는가 하면, 군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강변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일본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그런데 후소샤 교과서보다 더 위험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최근 검인정을 통과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와 친일을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왜곡 및 폄하하는 교과서가 국가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점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한국역사연구회 등 역사연구단체가 사흘간 검토한 결과, 교과서로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298개나 발견했다. 그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제외한 수가 그렇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다룬 Ⅴ단원은 오류와 왜곡이 심한 편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식민지근대화론, 즉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주장을 학생들에게 퍼뜨리려는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식민지근대화론이란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식민통치의 강제성과 폭력성, 그에 따른 우리 민족의 희생을 희석하는 식민통치 미화론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통치 미화론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일제에 의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자급자족적 경제관념에 변화가 일어났다’(교과서 283쪽)는 서술이다. 일제강점기 이전 우리 사회는 자급자족 단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된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일제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정체성론, 곧 한국은 스스로 발전할 여지가 없이 정체됐으며 따라서 식민지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는 궤변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학사 교과서 필자들은 21세기의 새로운 식민사학자들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사회·경제적 변화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성장과 발전이라는 용어가 자주 눈에 띈다. 일제에 의해 우리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려고 각종 통계 및 사진자료를 동원한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려고 만든 여러 통치정책은 조선총독부 홍보책자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착한 정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긍정적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부각하는 데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가 일제 식민통치를 어떻게 보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민족지사들은 조선교육회를 설립하여(1920), 교육의 기회균등을 위한 학교 증설, 교육차별 폐지, 한국어 교육용어 사용, 한국사 교육 등을 주장하였다. 이를 수용하여 일제도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였다’(교과서 260쪽)고 서술한 대목이다. 가히 일제강점기 역사상을 완전히 바꾸는 서술이다. 이 내용이 맞는다면 일제는 우리 민족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느라 애썼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사실 부분은 1920년 조선교육회가 설립됐다는 것뿐이다. 조선교육회에는 민족지사뿐 아니라 친일파도 다수 참여했다. 조선교육회가 한국어 교육용어 사용 등을 요구한 적 없고, 당연히 일제가 조선교육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선교육령을 개정한 것도 아니다. 이때 조선교육령 개정을 통해 한국어 교육이 강화된 것처럼 쓴 것도 무지의 소치다. 2차 조선교육령에는 한국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며, 오히려 ‘코쿠고(國語)’, 곧 일본어 교육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코쿠고를 한국어라고 자의로 해석한 셈이다. 그러나 일제는 결코 우리 민족의 민의를 존중하는 ‘착한 국가’가 아니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수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내에서의 강제동원으로 인정한 648만 명의 10분의 1 수준인 70만 명으로 축소했다(교과서 247쪽). 일제가 우리 민족을 불법적 또는 강제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제 식민통치를 얼마나 긍정적으로 봤는지, 심지어 식민통치기구(경성제국대학, 관립전문학교, 경성방송국 등)마저 우리 민족의 실력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한국을 발전시킨 요인이라고 본다(교과서 260, 296쪽 등).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 극우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심지어 다른 한국사 교과서는 반일이라서 문제라고 주장한다. 일본 우익이 교학사 교과서에 환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후쇼사 교과서보다 ‘더 위험한 교과서’인 셈이다. 이 교과서를 그대로 놓아뒀다가는 앞으로 일본이 역사를 어떻게 왜곡하든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일제 식민통치와 친일을 미화하는 교과서를 국가 이름으로 공인해놓고 일본의 과거사 망언에 대해 뭐라고 하겠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