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사화도 아닌, 진노랑상사화. 이름이 좀 생소하다.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상사화는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없어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사연을 담은 아름다운 꽃이다. 식물이 결실을 보는 데 필요한 인연의 두 주체는 꽃과 잎이 아닌 수술의 꽃가루와 암술머리지만, 형태적으로 볼 땐 잎과 꽃은 바늘과 실 같은 존재다.
어찌 됐든 상사화는 한여름에 꽃을 피우고 이미 져버렸다. 알고 보면 우리 땅에서 난 자생 토종 꽃도 아니다. 반면, 상사화가 질 무렵부터 꽃을 피워 지금까지 만날 수 있는 진짜 귀한 우리 꽃이 바로 진노랑상사화다.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꽃 색깔도 다르다. 진노랑색이라기보다 우윳빛이 아주 많이 섞인 은은한 노란색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 몇 포기씩 무리지어 피어난다.
혹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토종 우리 꽃 이름에 왜 외지에서 들어온 꽃의 이름인 상사화가 붙었는지 의아해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진노랑상사화는 우리 땅에서 자란 지 오래됐고,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이다. 다만, 식물학자들이 이 꽃에서 기존 상사화와 다른 무엇이 있음을 발견하고 최근 새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노랑상사화뿐 아니라 주황색 꽃이 피는 백양꽃, 진한 주홍색 꽃을 피우는 꽃무릇(석산)이 모두 꽃과 잎을 동시에 볼 수 없는 상사화와 한 집안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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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해살이풀인 진노랑상사화는 꽃자루가 올라왔을 때 키가 가장 큰데, 다 자라면 60cm 정도 된다. 잎은 봄에 나왔다 지고, 느지막이 꽃대를 올려 그 끝에 큼지막한 꽃송이를 몇 개씩 사방으로 매단다. 성큼 다가선 가을바람에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면, 영광 불갑사 같은 전라도 지방의 사찰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지금쯤 그 주변에 가면 마지막 남은 진노랑상사화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꽃이 질 무렵이면 다시 새로운 붉은색 꽃무리가 장관을 이룬다. 바로 석산이다. 이번 가을, 진노랑상사화를 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