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삼성동 한국무역협회를 찾아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오른쪽)으로부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휘호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박근혜 정부 1기 경제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조원동 조세연구원장을 각각 내정했다. 이들 뒤를 받치는 보건복지부 장관에는 진영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 부위원장(새누리당 의원), 국토교통부 장관에는 서승환 인수위 경제2분과 위원(연세대 교수)을 각각 내정했다. 이들 경제팀은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이끌어나갈까.
일단 경제팀 행적으로만 본다면, 경제민주화 실행력에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새 정부 경제를 이끌 ‘현오석-조원동’ 라인은 옛 경제기획원(EPB) 출신이다. 경제기획원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 개발과 성장을 주도했다.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를 등용한 데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시절 국가 주도 성장에 애착이 많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향후 박근혜 정부가 성장과 적극적인 경기부양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 조타수가 될 현오석 내정자는 ‘친(親)시장주의자’로 분류된다. 1973년 행정고시 14회로 관가에 입문해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때 참여했다. 2009년 KDI 원장에 취임한 이후 행보도 성장 쪽으로 기울어 있다. 대기업 견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현 내정자는 지난해 대선 직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의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반(反)기업 정서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경제민주화는 슬로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정책에 대해서도 그는 “(중소기업을) 보호하기보다 자생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경쟁을 강조했다.
친시장주의자 현오석
현 내정자가 내세우는 거시경제 정책은 ‘확장’이다. 지난해 말 KDI는 ‘2012년 하반기 경제전망’ 자료를 통해 재정정책에서 총지출 확대 등을 적극 고려할 것을 요구했다. 통화정책과 관련해서는 금리를 추가로 낮춰 경기 부진에 더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조 내정자도 경기가 어려울 때 적극적으로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경기침체가 수출 수요 감소에서 비롯됐으니 정부가 돈을 풀어 내수를 부양하고 경기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두 내정자는 고교(경기고), 대학(서울대) 선후배 인맥으로 얽혀 있다. 과거 경제정책국장과 경제심의관으로 같이 일한 경험도 있다. 두 사람 다 충돌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 만큼 경제정책을 운용하면서 철학 문제로 부딪히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민주화 후퇴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데는 김종인 전 위원장과 강석훈, 안종범 새누리당 의원 등 경제민주화를 주도했던 인사가 조각에서 제외된 탓도 크다. 특히 김 전 위원장은 대선 직후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에 대해 수차례 우려를 나타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이유로 잇따라 우려를 제기한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2월 19일 논평을 내고 현 내정자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운용 기조인 경제민주화 과제를 수행하는 데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참여연대 측은 “현 경제부총리 내정자는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소신과 활동을 보여준 적이 전혀 없다”면서 “(현 후보자는) 2009년 KDI 원장에 부임한 이후 경제민주화 정책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행보를 밟았다”고 밝혔다.
민주통합당(민주당)도 2월 20일 ‘김종인 위원장님, 어디 계십니까?’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민주당은 이 논평에서 “김 위원장께서 만드신 경제민주화 설계도가 시공도 못 해보고 쓰레기통에 버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정치 공세지만, 차기 정부에게는 뼈아픈 구석을 건드린 셈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 성향으로 볼 때 경제민주화가 폐기됐다고 보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많다. 현 내정자와 조 내정자는 자신의 경제철학적 소신만 앞장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 방향을 수행하는 데 무게를 둔 인사여서 경제 수장 스타일만으로 경제정책 방향을 예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조’ 라인은 이명박 정부 당시 ‘최-강’ 라인(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비교할 때 확실히 무게감이 떨어진다. 최-강 라인은 MB(이명박) 노믹스를 주도하며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2012년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및 소상공인 간담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서병문 중소기업중앙회 수석부회장, 박 대통령,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배조웅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관가를 떠난 지 14년 만에 컴백한 현 내정자가 자기목소리를 일부러 적게 내리라는 관측도 있다. KDI 한 관계자는 “현 내정자는 ‘국책연구기관은 정부 정책을 보조하는 기관’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분”이라며 “절대 윗사람에게 쓴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실제 현 내정자가 2011년 당시 경제성장률이 더 높게 나오도록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효과를 억지로 끼워 넣도록 지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KDI는 현오석 내정자 직전 원장이던 현정택 원장 시절에는 정부와 매번 충돌했다. 현정택 원장이 KDI 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지켜주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참여정부가 여러 차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기획재정부 한 관계자는 “요즘 KDI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KDI가 정부 정책을 잘 보좌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내정자도 스타일은 비슷하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정부에서 하달한 정책을 수행하는 데 능하다는 것이다. 조 내정자는 2009년 국무총리실 사무차장 시절 세종시 실무기획단장으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다. 그러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대로 무산되자 정운찬 당시 총리와 함께 관직을 떠났다. 앞서 조 내정자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재정부 경제정책국장과 차관보를 역임하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기획하는 데 참여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강도는 4·11총선 당시보다 많이 약해졌다. 박 대통령은 현행 대기업 지배구조는 인정하되, 중소기업과의 경쟁에서 불공정행위는 막겠다는 견해를 분명히 해왔다. 이에 현 내정자와 조 내정자도 동의해 ‘박근혜식 경제민주화’를 이행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대·중소기업 상생’, 이명박 정부의 ‘공정경제’와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점은 한계다.
공정거래위원장과 금융위원장이 인선되는 것을 모두 지켜본 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를 가늠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민주화 주요 현안이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에 걸렸기 때문이다. 순환출자 등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일감 몰아주기 금지와 부당이익 환수, 소액주주 권리 강화,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이 그것이다. 또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해 강석훈, 안종범 의원 등을 입각시키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많은 한계를 지니지만 보수 정당 후보가 이런 정도의 공약을 내걸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면서 “‘실천 가능한 것만 공약하고 공약한 것은 실천한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이미지인 만큼 이제는 실천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