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자로 19대 국회가 공식 개원한 지 50일, 의원 임기를 시작한 지 82일이 됐다. 이 기간에 국회에는 법안 1161건이 접수됐다. 임기 개시일인 5월 30일 하루에만 법안 53건이 제출되는 등 공식 개원한 7월 2일 이전에 제출된 법안이 400건을 넘었다. 하루 평균 14건. 이 가운데 철회한 법안 4건과 수정 가결한 법안 2건을 제외한 1155건이 8월 21일 현재 계류 중이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법안 96건을 제외한 1059건은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이다.
세 건 중 한 건 ‘꼼수’와 ‘편법’ 동원
임기 개시 석 달도 안 돼 1000건이 넘는 법안을 발의한 19대 의원들은 외형상 역대 의원에 비해 왕성한 입법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의원 발의 법안 건수만 놓고 보면 “의원들이 일 안 한다”고 비판할 게 아니라, 입법부 구성원으로서 ‘왕성한 입법활동’에 앞장선 공로로 ‘상’을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의원들의 왕성한 입법활동 이면에 ‘꼼수’와 ‘편법’을 적지 않게 동원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주간동아’가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검증하려고 19대 국회의원 임기 개시 이후 7월 31일까지 국회에 제출된 법안 982건 가운데 의원 발의 법안 902건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93건(32.5%)이 18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된 법안을 그대로 ‘재탕’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 건 중 한 건이 재탕 법안인 셈이다. 더욱이 몇몇 의원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법안을 발의하려고 친한 동료 의원끼리 대표발의 법안에 서로의 이름을 올려주는 ‘품앗이 서명’을 한 의심마저 든다.
7월 31일 현재 19대 의원 가운데 대표발의를 가장 많이 한 의원은 오제세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 의원이다. 오 의원은 법안 24건을 대표발의했는데, 그 비결 역시 재탕에 있었다. 24건 가운데 13건이 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이었다. 재탕 법안 13건 가운데 10건은 자신이 18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한 법안을 다시 대표발의한 것이고, 나머지 3건은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과 최영희, 홍정욱 전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했던 법안을 19대 국회 들어 대표발의했다.
친한 의원끼리 ‘품앗이 서명’
오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역점을 두고 입법을 추진했던 법안이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돼 19대 국회에서 입법을 관철하려고 다시 법안을 제출했다”며 “법안을 재탕했다는 자체보다 어떤 법안을 살려냈는지 법안 내용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대표발의를 많이 한 김우남 민주당 의원은 재탕 법안도 두 번째로 많이 제출했다. 그는 대표발의 법안 23건 가운데 12건을 재탕했다. 그중 10건은 18대 국회 때 자신이 대표발의했던 법안이고 2건은 이성남, 성윤환 전 의원이 18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했던 것을 19대 국회 들어 다시 대표발의한 것이다.
재탕 법안 발의 건수 3위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으로, 대표발의 법안 9건이 모두 18대 국회 때 자신이 대표발의한 것을 되살린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강창일, 이춘석 의원(민주당)과 이명수 의원(선진통일당)으로 각각 8건을 재탕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창일, 이춘석 의원은 8건 모두 18대 때 자신이 대표발의한 것을 되살렸으며, 이명수 의원은 8건 가운데 5건이 18대 국회에서 자신이 대표발의했던 것이고 3건은 권경석, 심대평 전 의원과 김상희 의원이 18대 국회 때 대표발의했던 법안이다.
의원들이 짧은 기간 안에 재탕 법안을 집중적으로 제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품앗이 서명’에 있다. 품앗이 서명은 법안 발의 최소 요건인 의원 10명의 서명을 채우려고 친한 동료 의원들이 대표발의한 법안에 서로 공동발의자로 서명해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A의원이 대표발의할 때 B, C, D 등 의원 9명이 서명해주면 B, C, D의원이 대표발의할 때 A의원이 서명해주는 식이다.
7월 31일 현재 법안 24건을 대표발의한 오제세 의원의 경우, 그가 대표발의한 법안에는 김우남 의원이 23번, 양승조 의원이 24번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김우남 의원도 법안 23건을 대표발의했는데, 이 법안 중 오 의원은 22건에 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승조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15건 가운데 12건에도 오 의원 이름이 올라 있다. 주로 민주당 의원끼리 서명을 주고받은 셈이다.
이명수 선진통일당 의원의 경우에는 새누리당 의원과 품앗이 서명이 많았다. 이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18건 중 김을동 새누리당 의원이 18건 모두에 서명했고 정희수 의원이 10건, 김태원 의원이 5건, 박인숙 의원이 4건에 서명했다.
반대로 이 의원은 김을동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4건에 모두 서명했으며, 정희수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5건, 김태원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5건, 박인숙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1건에 이름을 올렸다.
▲ 그림 보는 법 A → B는 B의원 대표발의 때 A의원이 서명에 동참한 횟수를 표시한다. 사진 하단은 사진 속 의원의 대표발의 법안에 각 의원이 서명한 횟수를 뜻한다.
19대 국회 발의법률안 중 품앗이 서명, 재활용 법안은 의안정보시스템 홈페이지(likms.assembly.go.kr/bill/jsp/main.jsp)를 통해 조사했다. 법률안 조사는 제안 일이 7월 31일 이전인 법안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품앗이 서명은 대표발의한 법안 수가 가장 많은 여야 의원 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각 법안의 공동발의자 명단을 통해 서로 공동발의한 법안 개수를 확인했다.
재활용 법안은 법안명을 기준으로 검색했다. 계류법안과 18대 국회 법안을 비교하기 위해 각 법안의 제안 이유 및 주요 내용을 확인했다. 18대 국회 법안의 경우 국회의원이 발의했으며 임기만료로 폐기한 법안만을 비교 대상으로 했다(정부, 위원장 등이 발의한 법안은 제외).
‘먼저 보는 게 임자’
품앗이 서명에 대해 의원들은 “법안 이해도가 높은 가까운 동료 의원에게 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제세 의원은 “내가 대표발의한 법안에 서명한 의원들은 대부분 3선급”이라며 “오랫동안 함께 의정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법안 이해도가 높아 수월하게 서명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국회 관계자들은 “19대 국회뿐 아니라 역대 국회에서도 새 국회가 구성된 초창기에는 으레 의원 사이에 법안 발의 경쟁이 불붙는다”고 말했다. 17대 국회에서부터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한 S씨는 “새 국회에서는 의원이 교체된 수만큼 보좌진도 함께 바뀐다. 의원과 보좌진은 입법활동을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추는데, 보좌진이 좋은 법안을 여러 건 찾아내 발의하는 것이 곧 의원의 의정활동 능력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새 국회가 문을 열면 어김없이 입법 경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입법 경쟁이 과열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법안 새치기’와 ‘법안 재탕’이다. ‘법안 새치기’는 국회 보좌진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로, 이전 국회에 제출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된 다른 전·현직 의원의 법안을 재빨리 가져다 대표발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낙선한 의원이 이전 국회에 제출한 법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고 한다.
호남의 한 재선의원 보좌관은 “새 국회가 문을 열면 하루빨리 의원 이름으로 대표발의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며 “법안을 발의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다른 의원이 먼저 법안을 가로채 대표발의하는 법안 새치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K의원이 18대 국회에 대표발의한 법안이 임기만료로 폐기된 경우, 19대 국회에서 L의원이 먼저 대표발의자로 나서서 법안을 발의하면 L의원의 성과가 된다. K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자신이 공들여 제출했던 법안의 ‘대표발의’ 권리(?)를 잃는 것이다. 이 같은 법안 새치기를 막으려고 의원과 보좌진은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경쟁적으로 이전 국회에 제출했지만 폐기된 법안을 하루빨리 재입법한다고 한다. 국회에는 ‘한 번 제출한 법안은 이미 한 차례 검토를 마쳤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재활용해도 된다’는 묵계가 있다는 것.
법안 발의 건수로 의정 평가
19대 국회 초선의원들이 짧은 기간 안에 법안 여러 건을 대표발의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법안 재탕’에 있었다. 수도권 한 초선의원은 “입법활동 경험이 없는 초선의원은 보좌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며 “내가 대표발의한 법안 3건은 함께 일하는 보좌진이 18대 국회에서 함께 일했던 의원이 대표발의했던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18대 국회에서 김학송 전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은 김성찬 새누리당 의원이 되살려냈고, 18대 국회에서 박우순, 송훈석 전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김현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19대 국회 들어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 증가세는 인상적이다(상자 기사 참조). 이 속도라면 19대 의원은 임기 안에 법안 2만5000건을 제출할 것으로 보인다. 18대 국회의 2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 원인으로는 각 정당의 공천심사제도와 무관치 않다. 올해 4월 치러진 19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은 “시스템공천을 하겠다”며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한 공천심사에 의정활동 항목을 포함했다. 본회의와 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 출석률, 법안 발의 건수 등이 주요 평가항목이었다. 이 때문에 법안 발의 건수가 적은 의원은 공천심사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19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이 앞 다퉈 법안 발의에 나선 것은 길게 보면 2016년 20대 총선 공천심사를 염두에 둔 사전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짧게는 해마다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발표하는 시민단체가 법안 발의 건수를 주요 평가항목으로 삼는 점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묻지마’제출도 여전
짧은 시간 안에 무더기로 폐기 법안을 재탕한 것과 관련해 여론은 따갑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치입법팀 김상혁 간사는 “폐기법안을 재탕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국회의원이 입법부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전문성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위”라며 “입법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전문성이 결여됐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이재근 팀장도 “가치 있는 중요 법안을 되살려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의원들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상황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폐기 법안을 입법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폐기 법안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법안 발의가 너무 많았다는 반증 아니겠느냐”며 “시간에 쫓겨 처리하지 못한 좋은 법안을 재활용으로 되살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새 국회가 구성됐다고 편의적으로 입법 건수를 늘리려 법안을 재탕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소영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19대 국회가 개원한 지 100일도 안 돼 1000건이 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은 도를 넘어선 입법행위”라며 “미국의 경우 법안을 발의한 의원 이름으로 법안을 제출하기 때문에 좀 더 의미 있는 법안을 만들려고 보좌진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 숙의한다”면서 “18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을 재탕해 하루빨리 제출하려 할 게 아니라 지금은 보좌진, 전문가와 함께 왜 국회에 제출됐던 법안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는지를 ‘리뷰’하면서 꼭 필요한 법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원 발의 법안 902건 가운데 재탕한 293건을 제외한 나머지 609건은 제대로 된 법안일까. 전문가들의 얘기는 부정적이다. 국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한 적이 있는 시사평론가 이종훈 씨는 “폐기 법안을 마구잡이로 재탕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역구 민원 해소 차원에서 ‘묻지마’식으로 무턱대고 법안만 제출하는 행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의원들이 지역구 민원 해소용 법안을 남발하는 것도 감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더기 입법에 부실 입법 우려 커져
국회 제출 법안 건수가 비약적으로 늘면서 ‘과부하’에 시달리는 곳이 의원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국회사무처다. 국회 각 상임위 입법조사관들은 밀려드는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역대 어느 국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국회 모 상임위 행정실장은 “일명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이 발효된 19대 국회에서는 법안 제출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법안이 자동으로 (상임위에) 상정돼 한정된 시간과 인원만으로 밀려드는 법안을 다 소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안 대부분은 해당 부처에 ‘의견조회’를 공문으로 보내 답변을 받은 뒤 검토보고서를 작성한다”며 “한꺼번에 여러 법안을 제출하면 처리 시한에 쫓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국회사무처 한 입법조사관도 “의원들이 활발히 입법활동에 나선 덕에 ‘통법부’(군사정권 시절 국회가 정부 제출 법안을 통과해주는 거수기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라는 오명에서 벗어난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법안이 양적으로 늘어난 만큼 질적으로도 성숙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양적 팽창에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이 다시 올라오면 ‘검토보고서도 큰 상황 변화가 없는 한 재탕하게 된다”고 말했다.
상임위에서 법안을 검토해야 할 의원들 역시 법안 심사 부담이 커진다. 제한된 시간 안에 수많은 법안이 상정되면 꼼꼼히 검토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이다. 한 재선의원은 “상임위 상정에 앞서 소위(소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상임위 전체회의와 법사위, 본회의 등 여러 단계에서 법안을 검토하기 때문에 부실 입법 우려는 적다”면서도 “법안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시급하고 중요한 법안을 제때 가려내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명호 교수는 “의원들이 법안 발의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편의주의적 서명 같은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며 “‘무더기 법안 발의-임기만료 폐기’라는 악순환 구조를 깨려면 의정활동 평가기준을 법안 발의라는 양적 평가가 아닌, 입법 성공률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료조사
김종욱 인턴기자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4학년
이채강 인턴기자 이화여대 중어중문과 4학년
장형수 인턴기자 한양대 정보사회학과 4학년
이여진 인턴기자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4학년
세 건 중 한 건 ‘꼼수’와 ‘편법’ 동원
임기 개시 석 달도 안 돼 1000건이 넘는 법안을 발의한 19대 의원들은 외형상 역대 의원에 비해 왕성한 입법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의원 발의 법안 건수만 놓고 보면 “의원들이 일 안 한다”고 비판할 게 아니라, 입법부 구성원으로서 ‘왕성한 입법활동’에 앞장선 공로로 ‘상’을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의원들의 왕성한 입법활동 이면에 ‘꼼수’와 ‘편법’을 적지 않게 동원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주간동아’가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검증하려고 19대 국회의원 임기 개시 이후 7월 31일까지 국회에 제출된 법안 982건 가운데 의원 발의 법안 902건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93건(32.5%)이 18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된 법안을 그대로 ‘재탕’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 건 중 한 건이 재탕 법안인 셈이다. 더욱이 몇몇 의원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법안을 발의하려고 친한 동료 의원끼리 대표발의 법안에 서로의 이름을 올려주는 ‘품앗이 서명’을 한 의심마저 든다.
7월 31일 현재 19대 의원 가운데 대표발의를 가장 많이 한 의원은 오제세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 의원이다. 오 의원은 법안 24건을 대표발의했는데, 그 비결 역시 재탕에 있었다. 24건 가운데 13건이 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이었다. 재탕 법안 13건 가운데 10건은 자신이 18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한 법안을 다시 대표발의한 것이고, 나머지 3건은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과 최영희, 홍정욱 전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했던 법안을 19대 국회 들어 대표발의했다.
친한 의원끼리 ‘품앗이 서명’
오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역점을 두고 입법을 추진했던 법안이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돼 19대 국회에서 입법을 관철하려고 다시 법안을 제출했다”며 “법안을 재탕했다는 자체보다 어떤 법안을 살려냈는지 법안 내용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대표발의를 많이 한 김우남 민주당 의원은 재탕 법안도 두 번째로 많이 제출했다. 그는 대표발의 법안 23건 가운데 12건을 재탕했다. 그중 10건은 18대 국회 때 자신이 대표발의했던 법안이고 2건은 이성남, 성윤환 전 의원이 18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했던 것을 19대 국회 들어 다시 대표발의한 것이다.
재탕 법안 발의 건수 3위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으로, 대표발의 법안 9건이 모두 18대 국회 때 자신이 대표발의한 것을 되살린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강창일, 이춘석 의원(민주당)과 이명수 의원(선진통일당)으로 각각 8건을 재탕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창일, 이춘석 의원은 8건 모두 18대 때 자신이 대표발의한 것을 되살렸으며, 이명수 의원은 8건 가운데 5건이 18대 국회에서 자신이 대표발의했던 것이고 3건은 권경석, 심대평 전 의원과 김상희 의원이 18대 국회 때 대표발의했던 법안이다.
의원들이 짧은 기간 안에 재탕 법안을 집중적으로 제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품앗이 서명’에 있다. 품앗이 서명은 법안 발의 최소 요건인 의원 10명의 서명을 채우려고 친한 동료 의원들이 대표발의한 법안에 서로 공동발의자로 서명해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A의원이 대표발의할 때 B, C, D 등 의원 9명이 서명해주면 B, C, D의원이 대표발의할 때 A의원이 서명해주는 식이다.
7월 31일 현재 법안 24건을 대표발의한 오제세 의원의 경우, 그가 대표발의한 법안에는 김우남 의원이 23번, 양승조 의원이 24번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김우남 의원도 법안 23건을 대표발의했는데, 이 법안 중 오 의원은 22건에 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승조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15건 가운데 12건에도 오 의원 이름이 올라 있다. 주로 민주당 의원끼리 서명을 주고받은 셈이다.
이명수 선진통일당 의원의 경우에는 새누리당 의원과 품앗이 서명이 많았다. 이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18건 중 김을동 새누리당 의원이 18건 모두에 서명했고 정희수 의원이 10건, 김태원 의원이 5건, 박인숙 의원이 4건에 서명했다.
반대로 이 의원은 김을동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4건에 모두 서명했으며, 정희수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5건, 김태원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5건, 박인숙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 중 1건에 이름을 올렸다.
▲ 그림 보는 법 A → B는 B의원 대표발의 때 A의원이 서명에 동참한 횟수를 표시한다. 사진 하단은 사진 속 의원의 대표발의 법안에 각 의원이 서명한 횟수를 뜻한다.
19대 국회 발의법률안 중 품앗이 서명, 재활용 법안은 의안정보시스템 홈페이지(likms.assembly.go.kr/bill/jsp/main.jsp)를 통해 조사했다. 법률안 조사는 제안 일이 7월 31일 이전인 법안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품앗이 서명은 대표발의한 법안 수가 가장 많은 여야 의원 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각 법안의 공동발의자 명단을 통해 서로 공동발의한 법안 개수를 확인했다.
재활용 법안은 법안명을 기준으로 검색했다. 계류법안과 18대 국회 법안을 비교하기 위해 각 법안의 제안 이유 및 주요 내용을 확인했다. 18대 국회 법안의 경우 국회의원이 발의했으며 임기만료로 폐기한 법안만을 비교 대상으로 했다(정부, 위원장 등이 발의한 법안은 제외).
‘먼저 보는 게 임자’
품앗이 서명에 대해 의원들은 “법안 이해도가 높은 가까운 동료 의원에게 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제세 의원은 “내가 대표발의한 법안에 서명한 의원들은 대부분 3선급”이라며 “오랫동안 함께 의정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법안 이해도가 높아 수월하게 서명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국회 관계자들은 “19대 국회뿐 아니라 역대 국회에서도 새 국회가 구성된 초창기에는 으레 의원 사이에 법안 발의 경쟁이 불붙는다”고 말했다. 17대 국회에서부터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한 S씨는 “새 국회에서는 의원이 교체된 수만큼 보좌진도 함께 바뀐다. 의원과 보좌진은 입법활동을 통해 서로 호흡을 맞추는데, 보좌진이 좋은 법안을 여러 건 찾아내 발의하는 것이 곧 의원의 의정활동 능력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새 국회가 문을 열면 어김없이 입법 경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입법 경쟁이 과열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법안 새치기’와 ‘법안 재탕’이다. ‘법안 새치기’는 국회 보좌진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로, 이전 국회에 제출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된 다른 전·현직 의원의 법안을 재빨리 가져다 대표발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낙선한 의원이 이전 국회에 제출한 법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고 한다.
호남의 한 재선의원 보좌관은 “새 국회가 문을 열면 하루빨리 의원 이름으로 대표발의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며 “법안을 발의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다른 의원이 먼저 법안을 가로채 대표발의하는 법안 새치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K의원이 18대 국회에 대표발의한 법안이 임기만료로 폐기된 경우, 19대 국회에서 L의원이 먼저 대표발의자로 나서서 법안을 발의하면 L의원의 성과가 된다. K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자신이 공들여 제출했던 법안의 ‘대표발의’ 권리(?)를 잃는 것이다. 이 같은 법안 새치기를 막으려고 의원과 보좌진은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경쟁적으로 이전 국회에 제출했지만 폐기된 법안을 하루빨리 재입법한다고 한다. 국회에는 ‘한 번 제출한 법안은 이미 한 차례 검토를 마쳤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재활용해도 된다’는 묵계가 있다는 것.
법안 발의 건수로 의정 평가
19대 국회 초선의원들이 짧은 기간 안에 법안 여러 건을 대표발의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법안 재탕’에 있었다. 수도권 한 초선의원은 “입법활동 경험이 없는 초선의원은 보좌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며 “내가 대표발의한 법안 3건은 함께 일하는 보좌진이 18대 국회에서 함께 일했던 의원이 대표발의했던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18대 국회에서 김학송 전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은 김성찬 새누리당 의원이 되살려냈고, 18대 국회에서 박우순, 송훈석 전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김현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19대 국회 들어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 증가세는 인상적이다(상자 기사 참조). 이 속도라면 19대 의원은 임기 안에 법안 2만5000건을 제출할 것으로 보인다. 18대 국회의 2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 원인으로는 각 정당의 공천심사제도와 무관치 않다. 올해 4월 치러진 19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은 “시스템공천을 하겠다”며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한 공천심사에 의정활동 항목을 포함했다. 본회의와 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 출석률, 법안 발의 건수 등이 주요 평가항목이었다. 이 때문에 법안 발의 건수가 적은 의원은 공천심사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19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이 앞 다퉈 법안 발의에 나선 것은 길게 보면 2016년 20대 총선 공천심사를 염두에 둔 사전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짧게는 해마다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평가해 발표하는 시민단체가 법안 발의 건수를 주요 평가항목으로 삼는 점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7월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무더기로 폐기 법안을 재탕한 것과 관련해 여론은 따갑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치입법팀 김상혁 간사는 “폐기법안을 재탕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국회의원이 입법부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전문성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위”라며 “입법에 대한 자신감이 없고 전문성이 결여됐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이재근 팀장도 “가치 있는 중요 법안을 되살려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의원들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상황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폐기 법안을 입법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폐기 법안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법안 발의가 너무 많았다는 반증 아니겠느냐”며 “시간에 쫓겨 처리하지 못한 좋은 법안을 재활용으로 되살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새 국회가 구성됐다고 편의적으로 입법 건수를 늘리려 법안을 재탕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소영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19대 국회가 개원한 지 100일도 안 돼 1000건이 넘는 법안을 제출한 것은 도를 넘어선 입법행위”라며 “미국의 경우 법안을 발의한 의원 이름으로 법안을 제출하기 때문에 좀 더 의미 있는 법안을 만들려고 보좌진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오랜 시간 숙의한다”면서 “18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을 재탕해 하루빨리 제출하려 할 게 아니라 지금은 보좌진, 전문가와 함께 왜 국회에 제출됐던 법안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는지를 ‘리뷰’하면서 꼭 필요한 법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원 발의 법안 902건 가운데 재탕한 293건을 제외한 나머지 609건은 제대로 된 법안일까. 전문가들의 얘기는 부정적이다. 국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한 적이 있는 시사평론가 이종훈 씨는 “폐기 법안을 마구잡이로 재탕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역구 민원 해소 차원에서 ‘묻지마’식으로 무턱대고 법안만 제출하는 행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며 “의원들이 지역구 민원 해소용 법안을 남발하는 것도 감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더기 입법에 부실 입법 우려 커져
국회 제출 법안 건수가 비약적으로 늘면서 ‘과부하’에 시달리는 곳이 의원 입법활동을 지원하는 국회사무처다. 국회 각 상임위 입법조사관들은 밀려드는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역대 어느 국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국회 모 상임위 행정실장은 “일명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이 발효된 19대 국회에서는 법안 제출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법안이 자동으로 (상임위에) 상정돼 한정된 시간과 인원만으로 밀려드는 법안을 다 소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안 대부분은 해당 부처에 ‘의견조회’를 공문으로 보내 답변을 받은 뒤 검토보고서를 작성한다”며 “한꺼번에 여러 법안을 제출하면 처리 시한에 쫓길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국회사무처 한 입법조사관도 “의원들이 활발히 입법활동에 나선 덕에 ‘통법부’(군사정권 시절 국회가 정부 제출 법안을 통과해주는 거수기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라는 오명에서 벗어난 것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법안이 양적으로 늘어난 만큼 질적으로도 성숙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양적 팽창에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이 다시 올라오면 ‘검토보고서도 큰 상황 변화가 없는 한 재탕하게 된다”고 말했다.
상임위에서 법안을 검토해야 할 의원들 역시 법안 심사 부담이 커진다. 제한된 시간 안에 수많은 법안이 상정되면 꼼꼼히 검토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이다. 한 재선의원은 “상임위 상정에 앞서 소위(소위원회)에서 검토하고, 상임위 전체회의와 법사위, 본회의 등 여러 단계에서 법안을 검토하기 때문에 부실 입법 우려는 적다”면서도 “법안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시급하고 중요한 법안을 제때 가려내기 힘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명호 교수는 “의원들이 법안 발의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편의주의적 서명 같은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며 “‘무더기 법안 발의-임기만료 폐기’라는 악순환 구조를 깨려면 의정활동 평가기준을 법안 발의라는 양적 평가가 아닌, 입법 성공률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자료조사
김종욱 인턴기자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4학년
이채강 인턴기자 이화여대 중어중문과 4학년
장형수 인턴기자 한양대 정보사회학과 4학년
이여진 인턴기자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