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아시아태평양전쟁(1937년 중일전쟁에서부터 1945년 8월 패전까지) 기간에 ‘일본인(피식민지 국민 포함)’ 약 310만 명이 사망했고, 그중 약 240만 명이 해외 격전지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산한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격전지에서 사망한 군인과 군속의 유골에 대해서는 ‘전사자매장규칙’과 ‘육군매장규칙’을 적용해 현지에서 화장한 뒤 일본으로 송환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전사자 유골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수많은 유골을 방치했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군정 기간에 생존자 귀환 문제를 놓고 골몰했다. 해외 식민지와 전투 지역에 남아 있는 일본 군인과 군속, 민간인 60여만 명의 본토 귀환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특히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권 지역에 남은 일본군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의 귀환 문제가 미군정 당국과 일본 정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1950년대 일본은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을 귀환시키려고 중국, 소련, 북한과 접촉하며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부터 시작된 전몰자 유골 수집
전사자 유골 송환을 위한 일본의 노력은 국권을 회복한 다음에야 본격화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협정(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 독립을 보장한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하자, 그해 6월 중의원에서 ‘해외 지역 등에 잔존하는 전몰자 유골 수집과 송환 등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으며, 10월엔 ‘전몰자 유골의 송환·위령에 관한 각의양해’를 결정해 유골 수습 및 송환 업무에 나섰다. 그 업무는 후생노동성(2001년까지 후생성)이 담당하며, 해외 잔류 일본군과 민간인의 귀환 업무를 추진하던 복원국(구 육군성·해군성 조직의 일부)의 업무를 승계해 전상병자와 전사자 유족에 대한 보상도 진행한다.
일본 정부는 접근이 쉬운 지역부터 수색했다. 미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 1953년 1∼3월 미나미토리, 이오지마, 웨이크, 사이판, 티니안, 괌, 앙가우르, 펠릴류에서 일본군 등의 유골을 수습하고 추도행사를 벌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알류산열도의 아투에도 유골수집단을 파견했다.
노동후생성은 1954년 7월 유골이 분포한 지역을 △부대원과 지역민 등 전원이 몰사한 지역 △중국과 소련 및 공산권 지역 △오키나와 △침몰 선박에 의해 해몰(海沒)한 경우 등으로 나누고, 수습 및 송환 가능성과 관련국과의 협의 정도 등을 고려해 대응했다. 초기에는 전몰 지역을 최우선으로 수습했는데 △영국령 태평양제도와 호주(동부 파푸아뉴기니 포함) 지역 △서부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등 △ 필리핀 △버마, 인도 등으로 지역을 세분화해 대응해나갔다.
초창기엔 주로 태평양 도서지역에 파견된 터라 운수성의 항해훈련소 소속 선박을 이용해 몇 개월간 해당 섬을 돌아다니며 유골을 수습하고 추도행사를 진행했다. 선박에는 후생성과 외무성 관계자 등 정부대표단 10여 명을 비롯해, 승조원과 훈련생 등 수십 명이 탑승했다. 외무성 관계자가 해당 국가에 협조를 요청해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지만, 몇몇 국가는 일본의 만행에 뼈아픈 기억과 상처를 갖고 있어 현지 주민의 반발과 배상 협상 등의 이유로 정박을 허가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간 나오토 총리 특별 지시
호주는 일본과의 어업협정 때문에, 버마와 인도네시아는 전후 배상 문제 때문에, 인도는 북동부 임팔 지역 분쟁에 따른 위험 때문에 정박은 허가하되 유골 수습을 금지하거나 선상에서의 추도행사만 허가하는 등 제한적으로 협조했다. 전쟁 가해국인 만큼 일본의 유골 수습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관련국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협조를 호소하며 순차적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갔다(뒤 페이지 표 참조).
일본의 유골 수습 작업은 2010년 간 나오토 당시 총리가 이오지마 유골발굴특별사업을 지시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간 총리는 야당 대표 시절인 2006년 이오지마를 방문한 적이 있고, 국회에서 “국가가 유골 수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오지마에서는 일본 측 2만2000여 명, 미국 측 7000여 명을 포함해 2만9000여 명이 숨졌지만, 유골을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 정부의 계속된 노력 덕에 매년 20∼50여 구의 유골을 발굴했으며, 2010년에는 820여 구, 2011년에는 340여 구를 수습했다.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일본 정부가 수습 및 송환한 유골은 126만여 구에 달한다. 2011년 한 해 동안 일본 정부는 유골 2000여 구를 수습했다. 현지에서 화장한 유골은 일본으로 송환해 DNA 감정 등을 거쳐 신원을 확인한 뒤 유족에게 전달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골은 국립 무명전몰자 묘원에 안치했다. 도쿄 야스쿠니신사 맞은편에 자리한 지도리가후치 공원 안에 묘원이 있다. 일본 정부는 유골을 수습한 해외 지역에 추도비를 건립하고, 매년 정부 주관으로 전몰자 추도행사를 개최한다.
민간인 위탁은 전면 재검토
한편 일본 정부가 민간단체 등에 해외 지역 유골발굴사업 일부를 위탁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민간단체가 성과를 늘리려고 현지 공동묘지를 파헤친 뒤 일본인 유골 확인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원주민 유골을 수습해, 현지인은 물론 외교적으로도 해당 국가의 반발을 산 것이다. 심지어 동물 뼈까지 섞어 송환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 정부는 위탁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초래한 ‘가해국’ 일본 정부조차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외를 돌며 자국민의 유골을 수습하고, 원혼과 유족을 위로하는 데 국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피해 당사국인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군정 기간에 생존자 귀환 문제를 놓고 골몰했다. 해외 식민지와 전투 지역에 남아 있는 일본 군인과 군속, 민간인 60여만 명의 본토 귀환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특히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권 지역에 남은 일본군 포로 및 민간인 억류자의 귀환 문제가 미군정 당국과 일본 정부의 큰 고민거리였다. 1950년대 일본은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을 귀환시키려고 중국, 소련, 북한과 접촉하며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부터 시작된 전몰자 유골 수집
전사자 유골 송환을 위한 일본의 노력은 국권을 회복한 다음에야 본격화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발효한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협정(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 독립을 보장한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하자, 그해 6월 중의원에서 ‘해외 지역 등에 잔존하는 전몰자 유골 수집과 송환 등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으며, 10월엔 ‘전몰자 유골의 송환·위령에 관한 각의양해’를 결정해 유골 수습 및 송환 업무에 나섰다. 그 업무는 후생노동성(2001년까지 후생성)이 담당하며, 해외 잔류 일본군과 민간인의 귀환 업무를 추진하던 복원국(구 육군성·해군성 조직의 일부)의 업무를 승계해 전상병자와 전사자 유족에 대한 보상도 진행한다.
일본 정부는 접근이 쉬운 지역부터 수색했다. 미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 1953년 1∼3월 미나미토리, 이오지마, 웨이크, 사이판, 티니안, 괌, 앙가우르, 펠릴류에서 일본군 등의 유골을 수습하고 추도행사를 벌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알류산열도의 아투에도 유골수집단을 파견했다.
노동후생성은 1954년 7월 유골이 분포한 지역을 △부대원과 지역민 등 전원이 몰사한 지역 △중국과 소련 및 공산권 지역 △오키나와 △침몰 선박에 의해 해몰(海沒)한 경우 등으로 나누고, 수습 및 송환 가능성과 관련국과의 협의 정도 등을 고려해 대응했다. 초기에는 전몰 지역을 최우선으로 수습했는데 △영국령 태평양제도와 호주(동부 파푸아뉴기니 포함) 지역 △서부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등 △ 필리핀 △버마, 인도 등으로 지역을 세분화해 대응해나갔다.
초창기엔 주로 태평양 도서지역에 파견된 터라 운수성의 항해훈련소 소속 선박을 이용해 몇 개월간 해당 섬을 돌아다니며 유골을 수습하고 추도행사를 진행했다. 선박에는 후생성과 외무성 관계자 등 정부대표단 10여 명을 비롯해, 승조원과 훈련생 등 수십 명이 탑승했다. 외무성 관계자가 해당 국가에 협조를 요청해 허가를 받아내기도 했지만, 몇몇 국가는 일본의 만행에 뼈아픈 기억과 상처를 갖고 있어 현지 주민의 반발과 배상 협상 등의 이유로 정박을 허가하지 않았다.
2010년부터 간 나오토 총리 특별 지시
호주는 일본과의 어업협정 때문에, 버마와 인도네시아는 전후 배상 문제 때문에, 인도는 북동부 임팔 지역 분쟁에 따른 위험 때문에 정박은 허가하되 유골 수습을 금지하거나 선상에서의 추도행사만 허가하는 등 제한적으로 협조했다. 전쟁 가해국인 만큼 일본의 유골 수습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관련국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협조를 호소하며 순차적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갔다(뒤 페이지 표 참조).
일본의 유골 수습 작업은 2010년 간 나오토 당시 총리가 이오지마 유골발굴특별사업을 지시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간 총리는 야당 대표 시절인 2006년 이오지마를 방문한 적이 있고, 국회에서 “국가가 유골 수습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오지마에서는 일본 측 2만2000여 명, 미국 측 7000여 명을 포함해 2만9000여 명이 숨졌지만, 유골을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 정부의 계속된 노력 덕에 매년 20∼50여 구의 유골을 발굴했으며, 2010년에는 820여 구, 2011년에는 340여 구를 수습했다.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일본 정부가 수습 및 송환한 유골은 126만여 구에 달한다. 2011년 한 해 동안 일본 정부는 유골 2000여 구를 수습했다. 현지에서 화장한 유골은 일본으로 송환해 DNA 감정 등을 거쳐 신원을 확인한 뒤 유족에게 전달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골은 국립 무명전몰자 묘원에 안치했다. 도쿄 야스쿠니신사 맞은편에 자리한 지도리가후치 공원 안에 묘원이 있다. 일본 정부는 유골을 수습한 해외 지역에 추도비를 건립하고, 매년 정부 주관으로 전몰자 추도행사를 개최한다.
민간인 위탁은 전면 재검토
한편 일본 정부가 민간단체 등에 해외 지역 유골발굴사업 일부를 위탁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민간단체가 성과를 늘리려고 현지 공동묘지를 파헤친 뒤 일본인 유골 확인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원주민 유골을 수습해, 현지인은 물론 외교적으로도 해당 국가의 반발을 산 것이다. 심지어 동물 뼈까지 섞어 송환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 정부는 위탁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초래한 ‘가해국’ 일본 정부조차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외를 돌며 자국민의 유골을 수습하고, 원혼과 유족을 위로하는 데 국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피해 당사국인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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