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또 한 번의 토요일, 서울 광화문광장. 이날도 어김없이 60만 촛불(경찰 추산 17만 명)이 모였다. 집회 양상도 4주 전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폭력사태는 없었다. 오히려 ‘박근혜 퇴진’을 주제로 열린 페스티벌 같았다. 시민은 200~300m 간격을 두고 군락을 이뤄 자유발언을 했다. 일부 시민은 ‘대통령이 하야해야 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했다. 경찰 차벽이 둘러쳐진 종로구 내자동로터리에서도 마찰은 없었다. 시민들은 경찰 차벽을 두드리거나 버스 위에 올라가는 대신 차벽을 만든 경찰 버스에 꽃이 그려진 스티커를 붙였다.
당초 이날 집회는 11월 5일과 12일 열린 두 번의 대규모 촛불집회와 달리 몸싸움이나 분쟁의 여지가 컸다. 서울행정법원이 19일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400m 떨어진 곳(율곡로, 사직로 인근)까지 시민의 행진을 허용했지만 경찰 차벽은 내자동로터리에 그대로 세워졌다. 게다가 같은 날 광화문광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역광장에서 박사모(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80여 개 보수단체가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맞불집회’를 열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이날 집회는 단 한 번의 물리적 충돌 없이 평화롭게 끝을 맺었다.
전인권 “때리면 맞읍시다”
한쪽에서는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60만 명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대통령 하야 반대를 외치는 7만 명(경찰 추산 1만1000명)이 대치했지만 별 소동 없이 집회가 마무리된 것은 사전에 맞불집회 주최 측이 경찰 요청을 받아들여 촛불집회 측의 행진 동선과 겹치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두 시위대가 마주할 일이 없었던 셈. 당초 맞불집회 주최 측은 광화문광장까지 행진을 계획했으나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충돌 위험이 있으니 행진 경로를 바꿔달라는 경찰 측 요청을 받아들였다. 주최 측도 물리적 충돌을 우려했는지 행진에 질서유지 요원 300명을 배치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숭례문과 서울역광장을 오가며 행진한 뒤 오후 6시쯤 해산했다. 보통 촛불집회 참가 인원이 가장 많은 시간이 오후 6~7시인 점을 감안하면 시간상으로도 맞불집회 참가자와 촛불집회 참가자가 만나기는 어려웠다.
11월 5일과 12일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현장에는 한두 명의 대통령 하야 반대론자가 등장했다. 이들은 “불쌍한 대통령이 왜 하야해야 하느냐”며 “왜 다른 대통령이 부정을 저질렀을 때는 가만히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에만 이렇게 대규모 집회를 여는 것이냐. 너희가 나라를 망치는 빨갱이들이다”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지팡이를 흔들곤 했다. 그때마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화를 내면서도 물리적 대응은 하지 않고 경찰을 불러 그들을 집회 대열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19일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는 이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경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역광장 집회에서 대통령 하야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니 굳이 촛불집회에까지 찾아와 맞붙을 이유가 없었던 것.
설령 맞불집회 참가자와 촛불집회 참가자가 만났다 해도 폭력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 중구의 정모(28)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하는 이유가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지만 아직까지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을 보면 이들에게 대통령은 국민이 뽑은 대표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인 것 같다. 답답한 마음보다 아직도 속고 있는 이들이 측은하다”고 말했다. 경기 의왕시에 사는 김민지(27·여) 씨는 “만약 맞불집회에 참가한 보수단체 회원이 집회 현장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더라도 절대 맞대응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 순간 4주간 지켜온 평화 촛불집회라는 가치가 무너질 수 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경찰을 불러 대응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고 밝혔다.
일상에 녹아든 촛불 물결
이날 저녁 7시 무렵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무대에서 공연한 가수 전인권(62) 씨도 “‘박사모’가 때리면 그냥 맞읍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맞으시는 분들 굉장히 많아요. 세계에서 가장 폼 나는 촛불시위가 되도록 합시다”라며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평화시위를 당부했다.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은 한 주 한 주가 지날수록 점점 더 깨끗해졌다. 대규모 집회가 처음 시작된 10월 29일 여기저기 난립하던 포장마차는 시민들의 행진에 방해되지 않게 골목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파는 음식 종류도 다양해졌다. 닭꼬치, 번데기, 어묵 등을 파는 포장마차 외 햄버거나 타코 등을 파는 푸드트럭과 커피 등 음료를 파는 카페트럭도 종종 보였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많아졌지만 거리는 더 깨끗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100ℓ들이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든 집회 참가자들이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우며 집회 현장을 돌았다.
이날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줍던 대학생 이준호(26) 씨는 “지난주부터 촛불집회에 나와 거리 청소를 했는데 이번 주는 청소하는 분이 더 많아진 것 같다”며 “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 인근 도로는 서울 시민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다. 집회가 끝나면 참가자인 우리가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날 내자동로터리의 경찰 차벽은 꽃 스티커로 뒤덮였다. 이 스티커는 이강훈 작가의 제안으로 예술 크라우드펀딩 ‘세븐픽쳐스’가 서울메트로 3호선 경복궁역 6번 출구에서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이 작가는 집회에 앞서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시민들을 가로막고 있는 차벽과 경찰들의 방패를 꽃으로 채워보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폭력적이지 않지만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며 시민들에게 스티커 퍼포먼스 참여를 독려했다. 서울 성동구의 이모(30) 씨는 “꽃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는 것보다 대치하고 있는 경찰과 촛불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의 마음을 더 흔들 수 있는 것 같다”며 퍼포먼스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밤 10시 30분 공식 집회가 끝날 무렵 비가 내렸고 집회 참가자들이 하나 둘 귀가하기 시작했다. 내자동로터리 차벽 앞에 있던 일부 시민은 집회가 끝나자 경찰 버스로 다가가 자신들이 붙였던 스티커를 떼어냈다. 스티커를 제거해야 하는 경찰들의 수고를 덜어주자는 취지였다. 이날 경찰 버스를 운전하러 온 한 경찰은 스마트폰 전광판 애플리케이션으로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써 시민에게 보여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