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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최순실 비리 의혹이 연일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100만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단두대 위 사형수’ 같은 처지에 몰리자 두 차례 대국민사과와 함께 검찰 조사, 특검, 국정조사, 책임총리 등등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며 백기투항하는 듯했다.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도 바짝 엎드렸다. 그랬던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약속이나 한 듯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180도 돌변했다. 그 시점이 정확히 11월 20일 검찰 발표일이다.
독특한 정신세계가 싹튼 닫힌 환경
검찰이 공개적으로 최순실 국정농단의 몸통이 박 대통령이라고 발표하자, 항복은커녕 정반대로 전면전에 나선 모양새다. 청와대와 친박계 인사는 일제히 검찰 발표를 ‘상상과 추측의 사상누각’이라 일축했고, 특히 ‘박근혜 호위무사’로 불리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한층 기세등등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본질적인 해답은 박 대통령의 정신세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우주에서 온 듯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탕탕탕!’ 전시(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 처참한 장면, 즉 1974년 8·15 광복절 행사장에서 있었던 문세광의 저격 장면과 79년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김재규의 10·26 사태 현장 검증 장면을 수십 년 동안 방송을 통해 봐야 했던 딸 박근혜의 심리상태는 극도의 트라우마 자체였을 것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심한 심리적 충격이 있을까. 부모 트라우마가 잊힐 만하면 다시 각인되고 또 각인되면서 충격 체감의 법칙이 은연중 작동했을 것이다. 웬만한 충격이 아니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 100만 촛불집회가 청와대 코앞에서 열려도 끄떡하지 않는 강심장, 검찰이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도, 야 3당과 비박(비박근혜)계가 아무리 몰아붙여도 꿈쩍하지 않는 강심장 말이다. 좋게 말하면 내공, 나쁘게 말하면 천하 옹고집이다.
최순실 게이트 사태 초반에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너무 당황해 일순간 휘청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려 심리적 전열을 재정비했다. 박근혜 리더십의 속성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바위 암(巖)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하고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바위! 알다시피 박 대통령은 아버지 생전 18년 동안 권력의 울타리 안에서 닫힌 생활을 했다. 보통 사람도 청와대에서 그렇게 긴 세월 닫힌 생활을 하면 공주나 왕자 스타일이 체질화될 법하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 사후 또다시 18년(1979년부터 98년 정계 입문 때까지)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이 기간 낮에는 주로 명산고찰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지냈다. 두 시기를 합쳐 36년 동안이나 닫힌 생활을 했다. 다시 말해 36년 동안 도(道)를 닦은 셈이다. 그 내공이 얼마나 강할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 덕에 출중한 남성 정치인이 판치는 여의도에서 거뜬히 살아남았고, 마침내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한 것이다.
문제는 청와대 입성 이후다. 어느 누구도 감히 직언하거나 대적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콕 찍혀 ‘유승민 신세’가 되고 말기에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대통령비서실의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그리고 이른바 문고리 3인방처럼 의리의 돌쇠 스타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누가 감히 ‘천근 바위’ 같은 박 대통령을 움직이겠는가.
그런데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최순실 씨다. 그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박근혜 바위’를 남몰래, 아주 손쉽게 들었다 놓았다 해왔다. 박 대통령이 36년 동안 도 닦는 것을 아버지인 고(故) 최태민과 함께 곁에서 보고 도왔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최악의 방어!
박 대통령은 최씨에게 ‘친한 언니’일 뿐이다. 콩나물 대가리까지 챙겨주고, 뒷전에서 “아직도 자기가 공주인 줄 아나봐”라고 아무렇지 않게 흉볼 수 있는 사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에게 최씨는 어떤 존재였을까. 편하고 유용한 전천후 참모였다. 박 대통령 처지에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의 성격과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으며, 어떤 비밀이든 보장되는 최씨야말로 연설문을 고치고 옷을 고르며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요구하기에 최고 적임자였을 것이다. 그랬던 최씨와 주변인이 줄줄이 구속됐으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36년 동안 갈고닦은 도력(道力)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야당 시절이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홀로 명상하며 복잡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연말로 이어지는 촛불집회와 특검, 탄핵정국에서도 박 대통령은 홀로 청와대 관저에 앉아 두 눈 꼭 감고 명상에 잠겨 전의(戰意)를 다질 것이다. 박 대통령이 만 43세 때인 1995년 5월 펴낸 심경고백 에세이 ‘내 마음의 여정’에서 “인생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며 이렇게 밝혔다.“인생은 어차피 하나의 싸움이다.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과의 싸움인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것이다. (중략)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고 조절할 수 있는 인내심의 단련, 어려움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투지,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용기. (중략) 자신을 이긴 사람에게 남이란 싸움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과거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자신과의 싸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어마어마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도 결국 자신과 싸움이라고 보는 것일까. 국민과 싸움, 역사와 싸움, 정의와 싸움이 아닌 자신과 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박 대통령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택할 것이다. 이는 놀라운 자기 최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은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청와대가 성형시술용 마취크림인 ‘엠라5%크림’, 고산병 치료제로 ‘비아그라’를 구매한 이유와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진상 규명이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등 한도 끝도 없다. 이는 결코 박 대통령 자신과 싸움이 아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가 아니라, 최악의 방어가 될 수 있다는 민심을 직시해야 한다. 민심이 거대한 해일이 돼 밀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