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이 망한 지 2년 후인 1912년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환갑의 고종은 소주방 나인에게서 얻은 이 딸을 침전에서 키우며 덕수궁 안에 유치원까지 만들었다.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만 10세인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갔듯, 덕혜옹주도 1925년 13세에 도쿄 여자학습원(女子學習院) 중등과에 입학시켰다. 시가(詩歌)를 잘 지어 천재로 불린 덕혜옹주가 쓴 시에 일본인 작곡가가 곡을 붙인 동요도 나왔지만, 후견인 없이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정신질환인 조발성치매에 시달리던 덕혜옹주는 황족의 단절을 꾀한 일제의 정책에 따라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 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을 했다. 결국 이혼당해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 행방불명되는 비극을 맞자 병세가 더욱 깊어졌다. 광복 후에도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당시 병원을 찾아간 언론인 김을한의 글이 비극을 그대로 전한다. “병원에 가보니 마치 감방 모양 쇠창살로 들창을 막고 있었고 음산했다. 한 병실 앞에 이르러 들여다보니 40여 세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 처참한 광경을 본 그는 덕혜옹주가 죽더라도 고국에서 죽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복 17년 만인 1962년 덕혜옹주가 환국하자 황실의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에게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왕조시대를 그리던 노인은 탄식 속에서 신문기사를 읽었고, 새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는 옛 유산의 단편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덕혜옹주는 창덕궁 수강재에 머물다 78세 일기로 1989년 타계했다. 무덤은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릉 오른쪽 산등성이에 있다. 최근 비운의 황녀를 그린 영화 ‘덕혜옹주’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근래 덕혜옹주가 널리 알려진 것은 2009년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와 2012년 12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덕혜옹주 특별전’ 덕분이다.
이혼 후 덕혜옹주의 의복이 영친왕에게 보내졌다. 영친왕은 1956년 덕혜옹주가 어릴 때 입었던 옷과 황실에서 보낸 의상을 도쿄문화학원에 기증했다. 복식학자 김영숙 씨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기증품을 조사해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는 김순희(86)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관장의 기억을 살려냈다. 김 관장은 낙선재를 방문했을 때 햇볕을 쬐던 덕혜옹주를 만난 특별한 인연을 잊지 못했다. 김 관장은 덕혜옹주 유품 전시회를 추진했고, 오누마 스나오(大沼淳) 도쿄문화학원 이사장과 50년 동안 쌓아온 교분으로 도쿄문화학원 복식박물관에서 관련 소장품을 빌려올 수 있었다.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환국 50주년’을 맞은 2012년 특별전은 그래서 가능했다.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은 ‘불안한 눈빛의 사진, 일본 옷을 입은 모습, 손때 묻은 은제 장난감, 어린 시절 색동옷, 환국 과정을 담은 편지’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정종수 관장은 개막식장에서 학예사들이 눈물을 흘린 사연을 소개했다. 학예사들은 전시회 개막 전날 남양주의 덕혜옹주 묘를 참배하고 고유제를 지냈다. 2015년 김순희 관장의 노력으로 당의와 스란치마, 돌띠 저고리, 풍차바지 등 도쿄문화학원 복식박물관이 소장하던 덕혜옹주 유품 7점이 영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 2층 왕실생활실에 덕혜옹주의 당의와 스란치마가 전시돼 있다. 이는 당대 최고 수준의 황실 복식일 뿐 아니라 덕혜옹주가 처절하게 상징한 망국민의 삶을 전해주는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