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저 ‘아무나(anybodies)’가 아닙니다.”
2014년 1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의제로 처음 상정됐을 당시 화제를 모았던 오준(61)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대사의 ‘감성연설’이다. 3월 2일(현지시각)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북한 통치자에게 몇 마디 호소합니다. 한국말로 하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발언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연이은 화제 발언과 연설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오 대사는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교관, 어머니는 대학교수였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의 동료인 미대 교수로부터 우연히 배우기 시작해 평생 취미가 된 그림 그리기 실력이 수준급이다. 연말연시 지인들에게 보내는 연하장 그림을 직접 그린다. 드럼 연주도 잘한다. 대학생 때도 밴드활동을 했고, 지금도 유엔 대사들로 구성된 밴드의 드러머다. 오 대사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못하는 게 뭡니까”일 정도. 그러나 잇단 감동연설로 소셜미디어에서 ‘스타 외교관’이 된 후에도 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을 미국 뉴욕 현지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2004년 오 대사가 외교부 국제기구국장(당시 외교통상부 국제기구정책관)으로 일할 때 기자는 외교부를 출입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여름 유엔 대사로 일하는 그를 뉴욕 특파원 신분으로 다시 만났다. 뉴욕에서 그를 1년 반 넘게 취재하며 ‘오준이란 외교관’을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있다. 공식 일정으로 바쁜 오 대사와 3월 8일 밤늦게까지 문자메시지, e메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엔 대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회의에서 다양한 주제로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중엔 우리 처지를 평이하게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중요한 연설들이 있습니다. 그럴 땐 이미 준비한 한국 정부의 생각을 담으면서도 ‘어떤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나’를 고민합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만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의 경우 ‘인권 탄압을 받는 북한 주민이 우리(남한 주민)와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었고, ECOSOC 연설에선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발전을 추구하느냐’가 명제였습니다. 북핵 관련 경제제재에서는 ‘북한이 왜 이런 무기들이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ECOSOC 의장직 수임 연설에서 그는 ‘못사는 A마을’과 ‘잘사는 B마을’을 묘사한 뒤 “나는 A, B 두 마을 모두에서 직접 살아봤다. A에서 B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던 곳(한국)이 A에서 B로 바뀌었다. 그것을 흔히 ‘개발(development)’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대북제재 결의 안보리 회의에선 “남한엔 핵무기가 없다. 남북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북한)의 (공격)목표가 우리(남한)라면 장거리 미사일도 굳이 필요 없다. 당신들은 미국이 (안보)위협이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이 태평양 너머 작은 나라를 왜 위협하겠나. 그 위협은 단지 당신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했다.
▼ 화제가 됐던 연설들은 마치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명하듯 쉽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선 가급적 짧고 쉬운 영어 표현으로, 원고를 보지 않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 역시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하고 심각한 이슈를 쉽고 분명한 표현으로 설명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 대사는 뉴욕뿐 아니라 미국 동부 전역에서 ‘섭외 대상 1순위 인기 강연자’로 꼽힌다.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부터 주부, 대학생,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이 그에게 강연을 요청한다. 지난해 뉴저지 주 한 한글학교에서 ‘유엔과 통일’을 주제로 강연할 때였다. 학생들은 “영어로 해달라” 하고, 참관 온 학부모들은 “한국말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적절히 섞어 설명하며 양쪽을 다 만족시키려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세 번째 습관인 ‘나에게 뻗어온 손은 반드시 잡는다’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생각한 후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먼저 손을 잡고 생각을 합니다. 알지 못하는 학생들로부터 받은 e메일에도 반드시 답을 하고,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잠시라도 만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망이 저의 소망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그들의 시간도 제 시간과 똑같이 유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원칙을 실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남에게 잘하면 언젠가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처세술적 접근이 아니다. 그냥 손을 뻗어온 분들 처지에서 보면 모두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단순한 역지사지의 발상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주싱가포르 대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이 원칙에 입각해 교민 사업가의 치킨집 개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부하직원들은 “대사가 그런 곳까지 다니면 일정 관리를 어떻게 하려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남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게 내게 도움이 되는지를 지나치게 따지고 계산하기 때문에 실행이 어려울 뿐”이라며 강행했다. 오 대사는 기자에게 “(부하직원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그런 (개업식) 초청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미국 한인사회의 대표적 풀뿌리운동단체인 뉴욕·뉴저지 기반의 ‘시민참여센터’ 김동석 상임이사는 “오 대사가 미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 이슈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관저로 초대해 만찬 행사를 열어주기도 했다. 참석자들이 지금도 그 고마움을 얘기한다”고 전했다.
감동은 공감할 때 생긴다. 오 대사의 감동연설은 아마도 그러한 공감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014년 1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의제로 처음 상정됐을 당시 화제를 모았던 오준(61) 주유엔대한민국대표부 대사의 ‘감성연설’이다. 3월 2일(현지시각)에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북한 통치자에게 몇 마디 호소합니다. 한국말로 하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발언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연이은 화제 발언과 연설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오 대사는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다. 아버지는 외교관, 어머니는 대학교수였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의 동료인 미대 교수로부터 우연히 배우기 시작해 평생 취미가 된 그림 그리기 실력이 수준급이다. 연말연시 지인들에게 보내는 연하장 그림을 직접 그린다. 드럼 연주도 잘한다. 대학생 때도 밴드활동을 했고, 지금도 유엔 대사들로 구성된 밴드의 드러머다. 오 대사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못하는 게 뭡니까”일 정도. 그러나 잇단 감동연설로 소셜미디어에서 ‘스타 외교관’이 된 후에도 그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을 미국 뉴욕 현지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2004년 오 대사가 외교부 국제기구국장(당시 외교통상부 국제기구정책관)으로 일할 때 기자는 외교부를 출입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여름 유엔 대사로 일하는 그를 뉴욕 특파원 신분으로 다시 만났다. 뉴욕에서 그를 1년 반 넘게 취재하며 ‘오준이란 외교관’을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있다. 공식 일정으로 바쁜 오 대사와 3월 8일 밤늦게까지 문자메시지, e메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생각한다”
▼ 안보리에서의 북한 관련 발언뿐 아니라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의장직 수임 연설 당시 ‘두 마을 이야기’ 등 회자되는 연설이 많습니다. 어떻게 구상하는 건가요.“유엔 대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회의에서 다양한 주제로 발언을 하게 됩니다. 그중엔 우리 처지를 평이하게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중요한 연설들이 있습니다. 그럴 땐 이미 준비한 한국 정부의 생각을 담으면서도 ‘어떤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나’를 고민합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만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의 경우 ‘인권 탄압을 받는 북한 주민이 우리(남한 주민)와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었고, ECOSOC 연설에선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발전을 추구하느냐’가 명제였습니다. 북핵 관련 경제제재에서는 ‘북한이 왜 이런 무기들이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ECOSOC 의장직 수임 연설에서 그는 ‘못사는 A마을’과 ‘잘사는 B마을’을 묘사한 뒤 “나는 A, B 두 마을 모두에서 직접 살아봤다. A에서 B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던 곳(한국)이 A에서 B로 바뀌었다. 그것을 흔히 ‘개발(development)’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대북제재 결의 안보리 회의에선 “남한엔 핵무기가 없다. 남북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북한)의 (공격)목표가 우리(남한)라면 장거리 미사일도 굳이 필요 없다. 당신들은 미국이 (안보)위협이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이 태평양 너머 작은 나라를 왜 위협하겠나. 그 위협은 단지 당신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했다.
▼ 화제가 됐던 연설들은 마치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명하듯 쉽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 경험상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선 가급적 짧고 쉬운 영어 표현으로, 원고를 보지 않고 눈을 맞추며 이야기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 역시 모두가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하고 심각한 이슈를 쉽고 분명한 표현으로 설명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 대사는 뉴욕뿐 아니라 미국 동부 전역에서 ‘섭외 대상 1순위 인기 강연자’로 꼽힌다.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부터 주부, 대학생,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이 그에게 강연을 요청한다. 지난해 뉴저지 주 한 한글학교에서 ‘유엔과 통일’을 주제로 강연할 때였다. 학생들은 “영어로 해달라” 하고, 참관 온 학부모들은 “한국말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적절히 섞어 설명하며 양쪽을 다 만족시키려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감동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는 최근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담은 ‘생각하는 미카를 위하여’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 책 말미에서 ‘내가 지키려고 하는 삶의 습관 7가지’를 소개했다. △무엇에나 의문을 갖는다 △소중한 것에 시간을 준다 △나에게 뻗어온 손은 반드시 잡는다 △필요한 것만 소유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할 때는 집중과 전환을 생각한다 △중요한 승부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멀리 떨어져 나를 본다 등이다.▼ 세 번째 습관인 ‘나에게 뻗어온 손은 반드시 잡는다’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생각한 후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먼저 손을 잡고 생각을 합니다. 알지 못하는 학생들로부터 받은 e메일에도 반드시 답을 하고,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잠시라도 만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망이 저의 소망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그들의 시간도 제 시간과 똑같이 유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원칙을 실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남에게 잘하면 언젠가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처세술적 접근이 아니다. 그냥 손을 뻗어온 분들 처지에서 보면 모두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단순한 역지사지의 발상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주싱가포르 대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이 원칙에 입각해 교민 사업가의 치킨집 개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부하직원들은 “대사가 그런 곳까지 다니면 일정 관리를 어떻게 하려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남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게 내게 도움이 되는지를 지나치게 따지고 계산하기 때문에 실행이 어려울 뿐”이라며 강행했다. 오 대사는 기자에게 “(부하직원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그런 (개업식) 초청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미국 한인사회의 대표적 풀뿌리운동단체인 뉴욕·뉴저지 기반의 ‘시민참여센터’ 김동석 상임이사는 “오 대사가 미국 내에서 위안부 문제 이슈화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관저로 초대해 만찬 행사를 열어주기도 했다. 참석자들이 지금도 그 고마움을 얘기한다”고 전했다.
감동은 공감할 때 생긴다. 오 대사의 감동연설은 아마도 그러한 공감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