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덕분에 오랜만에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 들은 질문 중 “한국이 어떻게 중진국 함정을 탈출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지난 글에서 중국 경제가 토지와 임금 등 생산요소 가격의 급등으로 성장률이 급격히 둔화되는 이른바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에 빠졌다고 지적한 것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모양이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중국이 100% 확률로 중진국 함정에 빠져 저성장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중국 정책당국도 자국 상태를 잘 알기에 ‘제조업 2025’ 같은 첨단산업 육성 정책을 펼치는 한편, 부동산 대출을 억제하고 제조업체에 집중적으로 대출해주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로 중국이 중진국 함정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 발생한 칭화유니그룹(淸華紫光) 파산 사태에서 보듯, 저금리에 기반한 자금 지원만으로는 첨단산업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머니투데이, 2021. 8. 1. ‘쓰러진 ‘반도체 굴기’ 선봉장… 6조 쏟아부은 中기업에 무슨 일이?’). 칭화유니는 2013년부터 약 336억 위안(약 6조2119억 원)을 선진국 반도체기업 인수합병에 쏟아부었다. 특히 2016년에는 메모리업체 창장메모리(YMTC·長江存儲)를 설립했는데, 자본금이 563억 위안(약 10조4087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중국은 왜 엄청난 자금력을 투입하고도 생산성 향상이 신속하게 이뤄지는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규율 부족’에 있는 것 같다. 최근 파산 위기에 빠진 부동산개발업체 헝다그룹 사태는 현재 중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쉬자인 헝다그룹 회장은 “나와 헝다를 위한 모든 것은 당, 국가, 사회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공식석상에서 발표한 바 있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기업들에 제대로 된 규율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블룸버그, 2021. 9. 23, ‘Evergrande Debt Crisis Is Financial Stress Test No One Wanted’). 쉬자인 회장의 말대로 헝다의 성장이 당과 국가 덕분이라면 헝다는 중국 부동산 및 건설산업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헝다가 중국 최대 부동산개발업체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미래 발전 가능성이 높은 땅을 알아보는 안목이나 다른 경쟁자 대비 차별화된 디자인 등이 아니라 정책당국과 친밀한 관계라면, 이는 곧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강력한 경쟁 압박을 가져온 외환위기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삼성전자 같은 세계적 기업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뉴시스]
외환위기 후 경쟁력 있는 기업만 살아남아
물론 기업이 정책당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비단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한국도 권위주의적 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시절에는 헝다와 비슷한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한국, 대만 같은 동아시아 산업국가는 두 가지 면에서 중국과 달랐다.첫 번째는 수출산업 육성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다. 동아시아의 산업정책 당국은 일단 내수산업 기업에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일을 극도로 꺼렸고, 또 내수 부문에서 성장한 기업이 수출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독려했으며, 이것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싶을 때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 모질게 채찍을 휘둘렀다(조 스터드웰, 2016, ‘아시아의 힘(e-book)’, 183쪽).
동북아시아 정치인들은 (중략) 기준에 미달하는 기업을 도태시킴으로써 산업정책의 성과를 높였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기업과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본을 회수하며, 제조업 허가를 정지하고, 심지어 파산이라는 궁극적인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중략) 일본, 한국, 대만은 승자를 고르기보다 패자를 걸러냈다.
물론 1990년대로 접어든 후에는 한국과 대만 모두 민주화되면서 채찍을 휘두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예전처럼 정부가 엄청난 자금력을 갖추지도 않았고, 더 나아가 민간기업에 비해 정보력 우위를 누리기도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한보와 기아 등 한국 제조업체의 연쇄 증설(및 기업 인수합병)과 파산 사태일 것이다. 예전 같으면 정부가 이런 위험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겠지만, 해외에서 자금 조달이 쉬워지고 기업의 힘이 커지면서 파국을 맞고 말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를 ‘중진국 함정’에서 탈출시킨 계기이기도 했다. 먼저 주식 및 채권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경쟁력 있는 기업, 정확하게는 투자자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기업은 예전보다 훨씬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됐다. 1999년을 전후해 일어난 주식형펀드 붐은 ‘바이 코리아(Buy Korea)’라는 자극적인 브랜드 마케팅 속에서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가가 상승한 기업은 기업공개(IPO)와 증자를 통해 당시 시가총액의 9%에 가까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참고로 1998년 자금 조달 규모는 10%를 훌쩍 뛰어넘었으니,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 이렇게 왕성했던 것은 1988년 한국전력이나 포스코 등 이른바 국민주를 매각한 이후 처음이었다.
외환위기가 가져온 두 번째 충격은 ‘강력한 경쟁 압력’이었다. 농산물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내수시장이 개방된 가운데 월마트, 까르푸 같은 해외 거대 유통기업이 진입한 것은 물론, 때마침 시작된 정보통신 혁명으로 휴대전화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부문 등에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됐다. 물론 현대전자와 팬택 등 수많은 기업이 쓰러졌지만 그 대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화학처럼 첨단산업 부문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역사상 처음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한국에서 잘 팔리는 경제 서적을 보면 제목에 ‘위기’ 혹은 ‘파국’ 같은 단어가 포함된 경우가 꽤 된다. 이런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아마 ‘외환위기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위기로 30대 그룹 중 단 11곳만 살아남은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들은 끊임없이 위기에 대비하려는 태도를 갖게 됐다.
기업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 세계 2위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교육열일 것이다. ‘그래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만 3세 아동의 교육 참여율’을 보여주는데, 한국이 압도적 1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교육 경쟁에 밀어 넣는 것이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최근 학계 연구를 보면 초교 입학 전 교육이 일생에 걸쳐 결정적 차이를 유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이코노미스트, 2016. 6. 25, ‘A running start’). 2011년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를 대상으로 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에 따르면 수학과 읽기 능력은 여섯 살에 이미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이 격차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미국 UCLA의 또 다른 연구는 취학 전 아동의 교육 능력 격차 발생 원인을 부유한 부모들의 사교육 열풍에서 찾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의 상당 부분이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교육으로 설명되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 가계는 어쩌면 선견지명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취학 전 아동을 열정적으로 교육시키는 한편, 66.5%의 가계가 사교육에 돈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일종의 ‘위기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은 강력한 경쟁 압박 속에서 세계 2번째로 높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비용을 지출하고, 가계는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교육에 돈을 쏟아붓는 시스템이 경쟁력 개선으로 이어졌다(헬로디디, 2020. 12. 9, ‘韓 연구개발 투자 89조 원 세계 5위… GDP 대비 2위).
물론 이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테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앞으로 경제와 자산시장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다음 시간에는 이 문제를 풀어보기로 하자.
*포털에서 ‘투벤저스’를 검색해 포스트를 팔로잉하시면 다채로운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