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기지에 정박 중이던 해군 상륙강습함 본험리처드함에 화재가 발생했다. [AP=뉴시스]
“화재 1주년 또 불” 조롱
진화가 끝나자마자 미 국방부는 해군범죄수사국(NCIS)을 중심으로 수사본부를 설치해 화재 원인을 수사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사안을 중대하게 받아들여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수사 착수 40여 일 만인 8월 28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용의자가 특정됐으며 한 달 이내에 수사가 종결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기지 곳곳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었고 일요일 아침이라 기지에 잔류한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용의자 색출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9월을 넘어 10월, 11월이 지나도록 미군 당국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 어떤 견해나 보도 자료도 내지 않았다.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사건 발생 약 1년 후 중국 관영매체가 묘한 보도를 했다. 중국 ‘환구시보’ 인터넷판 ‘환구망(環球網)’은 7월 7일 “정말 사람에 의한 방화인가. 상륙함 본험리처드 화재 1년째 미 해군은 설명하지 않고 있다(真是人为纵火? ‘好人理查德’ 号两栖攻击舰火灾一年了,美国海军依然不解释)”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냈다. 환구망은 “과거 미 해군은 이 사건보다 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선박 재해 조사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면서 “지난 1년간 미 해군은 이 대형 함정의 평시 침몰 이유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아 외부 세계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고의 은폐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사건을 굳이 들춰내 미국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환구망은 일주일 뒤 7월 13일 “본험리처드 화재 1주년 맞아 미군 순양함 또 한 척 발화(‘好人理查德’号火灾一周年之际, 美军又一艘巡洋舰起火)”라는 제하 기사로 미 해군 순양함 화재 사고를 보도했다. 사고가 발생한 군함은 타이콘데로가급(Ticonderoga class) 이지스 순양함 ‘게티즈버그(Gettysburg)’. 게티즈버그함은 조선소 도크에서 수리를 받던 중 용접 과정에서 생긴 스파크로 경미한 화재가 발생했다. 중국 매체들은 이 사고가 본험리처드함 사고 1주기에 맞춰 일어났다며 일제히 조롱하는 듯한 기사를 쏟아냈다.
상당수 공개출처정보(OSINT) 분석 전문가들은 중국 관영매체가 갑자기 본험리처드함 사건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을 두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평가를 내놨다. 중국은 사건 수사 경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부가 수사 결과와 관련해 중요한 발표를 앞뒀다는 정보를 포착해 미리 ‘떡밥’을 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 매체들의 보도가 있은 후 2주 만에 미 해군은 제3함대 사령관 명의의 성명을 통해 사건 용의자를 방화 혐의로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구속 수감된 용의자는 통일군사법전(Uniform Code of Military Justice·UCMJ) 제110조, 제126조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미 해군 측은 “현재 수병(Sailor) 1명을 기소해 예비심리가 진행되고 있다. 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만으로도 예비심리를 진행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8월 4일 미국 현지 언론은 기소된 방화범이 20세 해군 수병 소여 메이스라고 보도했다. 미 법원에 제출된 영장과 동료 장병 증언에 따르면 메이스는 평소 “해군을 경멸하는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7월 7일 중국 ‘환구시보’ 인터넷판 ‘환구망’은 미 해군 당국이 본험리처드함 화재 원인을 은폐한다고 주장했다. [환구망 캡처]
전략자산 연쇄 화재
미 해군은 사건에 대해 질의한 현지 매체 측에 보낸 e메일 답변서에서 “해당 수병이 샌디에이고로 전입해온 뒤 약 15개월 사이 같은 기지에서 3건의 방화 추정 화재가 더 있었다. 용의자의 연루 관계는 알 수 없다”고도 언급했다. 샌디에이고 기지에서는 2019년 3월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복서(USS Boxer, LHD-4)를 시작으로 2019년 11월 어벤저급(Avenger class) 기뢰전함 챔피언(USS Champion, MCM-4), 2020년 3월 하퍼스페리급 도크형 상륙함 하퍼스페리(USS Harpers Perry, LSD-49)에서 정박 중 의문의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본험리처드함과 달리 화재를 조기에 진압해 큰 피해는 없었다.본험리처드함 화재 후 일주일 사이 2척의 항공모함에서 또 화재가 발생했다. 7월 17일 금요일 오후 대서양 노퍽(Norfolk) 해군기지의 수리용 도크에서 정비 중이던 와스프급 강습상륙함 키어사지(USS Kearsarge, LHD-3)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방화요원이 재빨리 진압했다. 외주업체 소속 용접공의 실수로 불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사흘 후 7월 20일 뉴포트뉴스(Newport News) 조선소 도크에서 수리 중이던 최신예 항공모함 존 F. 케네디(USS John F. Kennedy, CVN-79)에서도 불이 났다. 이 또한 외주업체 용접공의 실수로 화재가 났으나 조기 진화에 성공했다. 113억 달러(약 13조 원)를 들여 건조한 최신예 항공모함이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
항공모함·강습상륙함 등 전략자산에서 연쇄적으로 화재가 발생하자 미군은 사건의 고의성을 의심하고 나섰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 미국에선 유학생, 관광객, 외교관으로 위장한 중국인이 해군기지에 불법 침입하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는 점. 이번에 기소된 본험리처드함 방화 용의자는 미 해군 현역 수병이지만 수사당국이 적용한 혐의를 살펴보면 묘한 구석이 있다.
우선 미군 측이 적용한 UCMJ 제110조는 ‘선박 또는 항공기에 대한 부당한 위험(Improper hazarding of vessel or aircraft)’에 관한 조항이다. 군 선박·항공기를 고의로 위험에 빠뜨린 자를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것이 뼈대다. 미군이 용의자의 고의 방화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눈여겨볼 점은 미군이 용의자에게 UCMJ 제126조를 함께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해당 조항은 사취 목적의 자산 소각(Burning property with intend to defraud) 처벌 조항이다. “고의로(willfully) 악의를 가지고(maliciously) 재산을 사취하고자(with intent to defraud)” 방화한 자가 법 적용 대상이다.
중국은 항공모함 산둥함(사진) 등 해군 전력을 강화하며 미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AP=뉴시스]
사건 배후에 외국 정부?
입대한 지 1년을 갓 넘긴 신병이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고자 미군 군함에 불을 지를 이유는 무엇일까. 일개 수병이 자국 전략자산에 불을 질러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본험리처드함은 사고 당시 중요한 성능 개량 공사를 하고 있었다. 경항공모함급 능력을 갖추고자 F-35B를 탑재할 수 있게끔 개량 중이었다. 미군은 이 상륙함을 개조해 아메리카함, 와스프함과 더불어 태평양지역에 F-35B 탑재 경항모 3척을 배치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발 맞춰 일본에 2개의 F-35B 비행대도 미리 배치했다. 그런데 본험리처드함이 사라지면서 미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이익을 보는 이는 누구일까.사건 직후 용의자를 특정했음에도 미 당국이 1년 가까이 사건을 계속 조사한 것은 결국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피의자가 누군가의 돈을 받고 군함에 불을 질렀다면 심각한 사보타주(sabotage) 공작이다. 이제 미 수사당국과 피의자 측은 방화 의도와 배후를 두고 법정에서 피 말리는 수 싸움에 들어갈 것이다. 만약 사건 배후에 외국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엄청난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본험리처드함 방화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