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은 이름처럼 검은 구멍이 아니다. [NASA 제공]
상상력을 동원해 그럴싸한 오컬트 추리물을 창작하는 건 즐거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뭣이 중한지 생각해보면 거기까지다. 대신 과학은 상상력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우주에도 비슷한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검은 구멍, 블랙홀이다. 천문학계에서 워낙 유명한 천체다 보니 처음 들어보는 명칭일 리는 없겠지만, 그 이름처럼 실제 구멍은 아니다. 블랙홀이라는 명칭은 미국 이론물리학자 존 휠러가 처음 언급했지만, 근본적인 개념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던 존 미첼이 제시했다. ‘암흑성’, 어두운 별 혹은 죽은 별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중력이 너무 강한 별이 존재한다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광자조차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몇 년 후 빛이 파동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죽은 별의 시체와 빛이 서로 간 상호 작용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위기가 100년 넘게 계속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내놓기 전까지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휠 수 있다고 가정했고, 파동 형태의 빛 역시 영향을 받으리라 믿었다. 이후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을 열심히 푼 독일의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의 이름을 따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인 슈바르츠실트 블랙홀을 제안했다. 만약 우주에 무한하게 큰 질량의 천체가 존재하여, 중력에 의해 막대한 질량이 중앙으로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주위에는 구 형태의 가상의 경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구의 크기를 나타내는 반지름을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라고 하며, 어떤 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시공간의 경계)이라고 불렀다. 당시 재미있는 가설로 관심을 끌었지만,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천체가 존재하리라는 기대는 누구도 하지 않았기에 블랙홀을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관측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시 전설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블랙홀 형성의 비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유명한 미국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역시 블랙홀에 관심이 많았는데, 1939년에 그는 당시 수학적 기량이 뛰어났던 하틀랜드 스나이더와 함께 지속적인 중력 수축에 관한 4쪽짜리 짧은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껏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대상을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면서, 그 존재를 처음 과학적으로 규명해낸 전환점이었다. 질량이 있는 모든 물질은 중력을 갖고 있다. 중력으로 인해 일반적인 별은 스스로 한 점에 모이려 애쓰지만, 점점 모이다 보면 구성하는 물질들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며 에너지를 내뿜다가 더는 압축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옥철’처럼 말이다. 열차가 역에서 멈출 때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도저히 누구도 탈 수 없게 된다. 별도 마찬가지로 죽어라 찍어 눌러 보지만, 중력조차 포기해버리는 시점이 온다. 그때가 되면 별은 크기를 유지하면서 한참 동안 밝게 빛나며 타오른다. 그런데 이건 태양처럼 일반적인 별일 경우에 그렇다. 만약 질량이 무시무시하게 큰 별이라면, 중력이 너무 강해서 물질들이 부딪히며 밀어내는 힘 정도는 가뿐히 무시해버린다. 특히 반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의 에너지원이 고갈되고 나면 웬만해선 중력을 막을 수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묵묵히 한 점으로 압축되고 나면, 원래 크기는 사라지고 어마어마한 질량만 남은 중력 개미지옥이 되어버린다.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는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지도 몰랐던 우주 구성의 근본적인 발견을 덤덤한 어조로 풀어냈다.1963년 두 개의 별에서 블랙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최초로 발견한 뉴질랜드 과학자 로이 커. [The University of Canterbury;캔터베리대학]
블랙홀 관측에 성공한 과학자들
우리 은하 중심에는 아주 거대한 블랙홀이 존재한다. 블랙홀을 질량으로 구분하면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바로 항성질량 블랙홀과 거대질량 블랙홀이다. 전자는 태양보다 수십 배가량 무겁고, 후자는 수십만 배에서 수십억 배에 이를 만큼 훨씬 무겁다. 우리 은하 중심, 궁수자리 A별 근처에 있는 블랙홀은 후자이면서 지구에서 가장 가깝다. 또 연구할 만한 녀석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M87 은하 중심에 있는 거대질량 블랙홀이다. 굉장히 멀리 있긴 하지만, 그만큼 커서 지구에서 보이는 크기는 둘 다 비슷하다. 두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크기는 2008년과 2012년에 각각 여러 망원경의 간섭계를 통해 측정됐다. 하지만 분해능이 낮아 제대로 관측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둘 중에 먼저 볼 녀석을 골라 제대로 봐야 했다.2009년 드디어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여러 지역의 관측시설을 동시에 사용해 마치 지구 크기의 망원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관측 대상은 우선 M87 은하로 결정됐다.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동시 관측이 가능하며, 무거워서 주변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가 비교적 천천히 변하기 때문이었다. 남극 망원경을 포함, 총 8대의 망원경으로 우리나라에서 미국 거주자의 코털을 셀 수 있을 정도의 분해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2019년 4월,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블랙홀 그림자가 최초로 직접 관측됐다. 전 세계 약 100개 연구기관에 소속된 3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참여했고, 특히 한국의 젊은 과학자 김준한 박사와 한국천문연구원의 손봉원 박사 등 국내 연구자도 여럿 성공에 이바지했다.
블랙홀의 그림자를 봤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난제는 남아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들어낸 블랙홀의 그림자는 실제로 찍은 결과와 비슷했지만 분명히 보이는 몇 가지 차이점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항성질량 블랙홀과 비교하면 거대질량 블랙홀은 너무 무거워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무거워질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행히 지난해 6월, 서울대 우종학 교수 연구팀은 빛의 메아리 효과를 이용해 중간질량 블랙홀의 존재를 관측했고, 201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중력파를 통해 새로운 블랙홀 관측의 지평을 열고 있는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도 최근 태양의 142배에 달하는 블랙홀의 형성 과정을 포착했다. 수많은 노력 끝에 그림자를 봤지만, 여전히 블랙홀은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체 중 하나다. 언제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주의 검은 구멍을 직접 볼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그 구멍은 인류를 지옥이 아닌 지식의 옥좌로 인도할 것이 확실하다.
궤도_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