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차르’를 넘어 ‘술탄’까지 넘보는 푸틴

중동의 ‘러시아 벨트’는 어디까지 확장될까

  • 카이로 = 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입력2019-11-1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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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0월 터키군의 쿠르드족 공격으로 전운이 감돌던 시리아 북동부. 전 세계를 긴장시킨 이곳에서 해결사는 ‘세계의 경찰’ 미국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은 터키군의 공격 계획을 알면서도 철군을 강행해 문제를 키우는 역할을 했다. 미국은 터키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인명피해 우려가 높아지고, 다에시(이슬람국가를 참칭한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비칭)와 전쟁 때 동맹이던 쿠르드족을 버린다는 비판이 커지자 형식적인 대(對)터키 경제제재를 마련하는, 그야말로 보여주기 식 대응만 내놓았다. 

    시리아를 비롯해 이라크, 레바논 등과 같이 이슬람교 시아파 인구 비율이 높고 정세가 불안정한 이른바 ‘시아벨트 지역’에서 막강한 정치·안보 영향력을 발휘해온 시아파 종주국 이란도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을 해결 혹은 중재하지 못했다. 


    ‘해결사’ 혹은 ‘중재자’는 바로 러시아, 그리고 이 나라를 이끄는 ‘현대판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었다. 10월 22일 푸틴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소치(러시아 흑해 휴양도시) 정상회담에서 비록 불안정하지만 사태 해결을 위한 조치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터키와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 거점지역에서 쿠르드족 민병대를 철수시키기로 합의했고, 이를 위해 공동순찰을 결정했다(그림 참조). 러시아·터키 정상회담 직전에도 러시아는 시리아 북동부에 군대를 파견해 터키군과 시리아 정부군의 충돌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중동에서 발을 빼는 미국의 공백을 러시아가 메우는 모습을 잘 보여준 사례”라며 “중동에서 러시아가 얼마나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동에서 구축되고 있는 러시아 벨트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이미 터키, 이스라엘로 확대된 상태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리비아로도 확장되고 있다.

    시리아, 러시아의 중동 진출 거점지

    특히 시리아는 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확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나라다. 냉전시대 때부터 가까웠던 두 나라는 2011년 ‘아랍의 봄’(아랍 국가들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시리아가 내전에 빠져들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때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이어 시리아를 통치하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대규모 반군과 다에시의 팽창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2015년 아사드 대통령은 결국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군은 합법적으로 시리아에 발을 디뎠다. 러시아가 터키군의 쿠르드족 공격을 비롯해 시리아 내 미군과 이란군의 활동 등 ‘외국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초청받지 않은 외국군은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러시아군은 시리아 정부군과 함께 반군, 다에시에 강경하게 맞선다. 무엇보다 첨단 전투기와 폭격기를 대거 동원한 ‘융단폭격’을 감행해 단기간에 반군과 다에시의 역량을 약화시켰다. 시리아 출신들은 “러시아군은 반군과 다에시의 장악지역을 공습할 때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 않은 채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고 입을 모은다. 

    아사드 정권이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2017년과 2018년 수차례 화학무기를 이용해 반군 장악지역을 공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러시아가 있다. 러시아군을 든든한 뒷배로 둔 이상 아무리 잔혹한 방식으로 반군에 대응해도 국제사회가 강경하게 나올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이 비(非)인권적인 강경 대응으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을 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친미 중동 국가까지 장악하다

    9월 12일 러시아 소치에서 만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10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푸틴 대통령과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 [AP = 뉴시스]

    9월 12일 러시아 소치에서 만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10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푸틴 대통령과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 [AP = 뉴시스]

    러시아는 다른 중동 국가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중동 영향력 키우기 전략이 의외로 잘 먹혀든 나라가 터키와 이스라엘이다. 두 나라 모두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군의 ‘중동 철수’ 상황에서 큰 시사점을 지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터키의 경우 옛 소련을 견제하고자 미국이 주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핵심 회원국이 맞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최근 친(親)러시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제재 경고와 ‘F-35 개발 프로젝트’ 참여 제외 속에서도 나토 회원국으로는 유일하게 러시아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로 불리는 ‘S-400’ 미사일방어시스템 도입을 결정했다. 시리아 북동부 공동순찰은 러시아군의 나토지역 진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터키의 반미 행보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최대 정적(政敵)이자 이슬람 지도자인 펫훌라흐 귈렌이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귈렌은 1999년부터 20년째 미국에 망명 중이며, 2016년 7월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 배후로 귈렌을 지목했다. 터키는 미국 정부 측에 귈렌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이때부터 에르도안 대통령의 반미·친러 행보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란과 함께 ‘주적’으로 꼽히는 시리아 내 군사시설을 공습할 때 러시아와 사전 협의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는 내전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상태라 첨단기술과 장비가 필요한 대공시스템은 사실상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한 중동외교 소식통은 “러시아의 묵인 없이는 이스라엘 공군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시리아 깊숙이 날아가 공습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대러시아 외교도 활발하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며, 2015년 이후 러시아를 5번이나 방문했다. 미국 방문(6번)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1980년대 후반 동구권과 옛 소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 유대인이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한 ‘인적 네트워크’ 역시 양국을 연결하는 무지개다리가 되고 있다. 성일광 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한국이스라엘학회장)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부터 미국의 중동 철수와 러시아의 중동 진입 현상은 뚜렷했다”며 “이 과정에서 이란과 핵합의까지 이뤄져 새로운 안보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10월 푸틴 대통령이 역시 미국 동맹국인 사우디와 UAE를 12년 만에 방문해 큰 환대를 받은 가장 큰 이유로 미국의 탈(脫)중동 정책과 소극적인 개입이 꼽힌다. 특히 사우디는 국영석유기업 아람코의 핵심 석유생산 시설이 9월 이란이 배후인 듯한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받았는데도 미국이 적극적인 대응 의지를 보이지 않자 불안해하고 있다. 동맹이던 쿠르드족을 하루아침에 버린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 역시 불안감을 키운다.

    미국보다 매력적인 협력 파트너

    최근 러시아는 시리아 못지않게 심각한 내전을 겪어온 리비아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11월 5일 러시아가 저격수가 대거 포함된 200여 명의 용병 부대와 전투기·미사일 등 첨단무기를 리비아에 투입하며 다시 한 번 영향력 행사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아랍의 봄 이후 내전이 벌어져 42년간 철권통치해온 무아마르 카다피가 축출된 리비아는 2014년 총선 뒤 수도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중앙정부와 동부 벵가지에 근거지를 둔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국민군이 계속 대립하고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하프타르 진영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왔다. 하지만 용병부대 파병 등 직접적인 개입 움직임을 보이며 다시 한 번 이 지역에서 해결사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리비아는 바다로는 지중해, 땅으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이어지고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막대해 러시아가 눈독 들일 만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런 리비아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할 경우 러시아는 미국을 대신하는 ‘중동의 경찰’로서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현대판 차르 이미지에 ‘현대판 술탄’ 이미지까지 더해가고 있다. 마크 캐츠 미국 조지메이슨대 정치학과 교수는 ‘알자지라’ 기고를 통해 “중동에선 러시아와 손잡지 않으면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전통이나 인권 개념이 약한 중동 국가의 특성상 러시아는 미국보다 더욱 매력적인 ‘보험’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형식적으로라도 민주화와 인권을 강조하고 ‘레드라인’을 넘어선 정권에 대해선 제재를 가하는 미국과 달리, 상호 이익만 일치한다면 러시아는 얼마든지 광범위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 아사드 정권이 자국민을 상대로 한 화학무기 사용도 개의치 않는 모습은 중동의 스트롱맨들에게는 이미 매력적으로 보였을 공산이 크다. 앞으로도 차르에 줄서는 중동 국가가 많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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