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NY Post]
하원의 탄핵조사 비공개 청문회에서 잇달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리한 증언이 나오자 공화당 하원의원 24명은 10월 23일 오전 정보·외교·정부개혁감독위원회 등 3개 위원회가 공동으로 탄핵조사를 진행해온 청문회장으로 몰려갔다. 청문회장은 비밀정보를 다룰 때 쓰는 의회당 지하 ‘특수정보시설(SCIF)’에 마련됐다. 공화당 의원들은 청문회장을 밀고 들어가 점거한 뒤 탄핵조사가 ‘밀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고함 등을 지르고 애덤 시프 정보위원장에게 정보 공개를 요구했다. 이에 맞서 민주당 의원들도 공화당 의원들에게 청문회장을 나가라고 소리치면서 버텼다. 양당 의원들이 대치해 사태가 갈수록 험악해지자 시프 위원장은 휴회를 선언하고 청문회장을 빠져나갔다. 공화당 의원들은 4시간가량 청문회장을 점거하다 오후 2시 해산했다. 이들은 점거 중 피자 등을 주문해 먹기도 했다. 이곳에선 의원들이나 보좌진의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 휴대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는데도 공화당 의원들은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투쟁속보’라고 올리기도 했다.
대통령의 사주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의사당 지하 청문회장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 비공개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라말파 의원 트위터]
이번 사태는 하원의 공화당 1인자 케빈 매카시 원내대표와 2인자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총무가 진두지휘했다. 매카시 원내대표는 청문회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은 이번 탄핵조사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탄핵조사는 햇볕 아래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컬리스 원내총무도 “민주당이 편파적인 규칙과 증인들을 동원해 대통령을 탄핵하려 하는데 투표권을 가진 의원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도 없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4일 트위터에 ‘공화당 하원의원들이 미국 역사상 가장 엄청난 마녀사냥에 강경하고 영리하게 대응해줘 감사하다’는 글을 올렸다. 스테퍼니 그리셤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의원들의 활약을 보면서 기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이 물리력을 사용한 것은 민주당이 우크라이나 스캔들 청문회를 비공개로 진행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보를 언론에 흘린다는 불만에 따른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짐 조던 공화당 하원의원은 “무엇이 진행되는지 알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이 마침내 비등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원 3개 위원회의 비공개 청문회에는 민주당 의원뿐 아니라 공화당 의원들도 똑같이 참석하고 있기 때문에 ‘밀실’이라는 일부 공화당 의원의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 시프 위원장은 증인들이 서로 말을 맞추는 것을 막고자 비공개로 진술을 청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일부 공화당 의원이 의회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수세에 몰리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 대한 탄핵조사를 ‘린치(lynch)’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린치는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가하는 잔인한 폭력이나 처형을 뜻한다. 이 용어는 18세기 미국 사법체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을 때 버지니아주 치안판사 겸 농장주인 찰스 린치가 흉악범이나 정적들을 사적(私的)으로 처형하고자 ‘린치법(Lynch law)’을 만든 데서 유래됐다. 이후 린치는 1860년대 남북전쟁 전후로 백인들이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인종차별적 공격을 의미하는 말이 됐다.
우크라이나 스캔들
윌리엄 테일러 주우크라이나 미국대사 대행(가운데)이 하원 탄핵조사 청문회에 출석하고 있다. [ABC 뉴스]
그런데 윌리엄 테일러 주우크라이나 미국대사 대행이 10월 22일 비공개 청문회에 출석해 트럼프 대통령과 ‘비선’으로 불리는 개인 변호사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고든 선덜랜드 주유럽연합(EU) 미국대사 등의 부적절한 행위를 낱낱이 증언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했다. 테일러 대사 대행은 “선덜랜드 대사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와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부패 의혹을 우크라이나 정부가 조사한다고 선언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테일러 대사 대행은 또 “국내 정치적 이유로 중대한 안보 지원을 보류해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손상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됐다”고 밝혔다. 테일러 대사 대행은 국방부와 국무부, 중앙정보국(CIA), 존 볼턴 전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과 회의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고 밝혔다.
특히 테일러 대사 대행의 이 증언 내용은 민주당 의원들이 언론에 흘린 것이 아니었다. 테일러 대사 대행이 청문회에 출석하기 전 변호인을 통해 언론들에 15쪽 분량의 성명서를 미리 배포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알린 것이었다. 또 선덜랜드 대사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도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내부고발자 제보보다 더 상세한 증언과 증거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테일러 대사 대행은 2006~2009년 주우크라이나 미국대사를 역임했으며, 마리 요바노비치 전 대사가 5월 트럼프 대통령과 줄리아니 전 시장에게 찍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경질된 이후 대사 대행을 맡아왔다. 하원의 탄핵조사가 시작된 이후 청문회 증언에 나선 9번째 인물인 테일러 대사 대행은 직업 외교관으로서 평소 업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꼼꼼히 메모해왔다. 미국 언론들은 ‘결정적 한 방’이 터졌다면서 ‘외교관의 폭탄 증언’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하다 경질된 볼턴 전 보좌관의 청문회 증언도 추진하고 있다. 볼턴 전 보좌관이 청문회에 나서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핵 폭탄급’ 증언을 할 수도 있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비공개 청문회에 대한 반발을 고려해 추수감사절(11월 28일) 전후로 공개 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이후 하원 3개 위원회는 탄핵소추 근거가 될 수 있는 공개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공개 청문회와 보고서가 발표된 후에는 하원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소추할지 여부를 놓고 논의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민주당이 과반을 점한 하원에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될 수 있지만, 공화당 의석이 많은 상원에선 탄핵안이 부결될 수 있다. 하원의 경우 전체 의석수 435석 가운데 민주당이 235석으로 절반(218석)을 넘는다. 상원의 전체 의석은 100석으로 공화당 53석, 민주당 45석, 무소속 2석이다. 탄핵안이 가결되려면 상원의원 67명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최소 20명 이상 공화당 상원의원의 반란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오판
트럼프 대통령(가운데)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미 특수부대의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수뇌 제거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백악관]
하지만 IS 수괴 제거가 하원의 탄핵조사를 상쇄할 수는 없을 듯하다.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언과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외교·안보 분야에서 무리수를 두는 등 눈먼 결정을 내리거나 청문회에서 폭탄 증언들이 잇따를 경우 자칫 최악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국민 전체가 아닌 지지층만의 결집을 통해 탄핵정국을 돌파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 오판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