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만보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나우 : 시간의 물리학
리처드 뮬러 지음/ 장종훈·강형구 옮김/ 이해심 감수/ 바다출판사/ 468쪽/ 2만5000원
저자는 미국 실험물리학자다. 빅뱅 후 50만 년이 지난 무렵 아기우주가 방출한 우주 마이크로 배경복사를 관측함으로써 ‘시간의 시작’을 측정했고, 초신성 관측을 통해 우주의 가속팽창을 발견함으로써 빅 크런치(우주가 블랙홀 같은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가설적 상황)가 발생하는 ‘시간이 끝’이 없을 것임을 규명했다. 이런 구체적 경험과 다양한 물리 이론을 결합해 ‘시간의 물리학’에 대한 최신 정보를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에너지가 흩어지면서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은 더는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지 못한다. 시간이 특정한 방향성을 띤다는 ‘시간의 화살’도 부러졌다고 한다. 빅뱅 이후 공간뿐 아니라 새로운 시간도 계속 만들어진다. 따라서 ‘지금’이란 팽창하는 시간의 최전선 경계를 의미한다. 또 이런 ‘지금’들이 긍정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와 물리학이 공존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과 많은 내용이 겹친다. ‘타임 트래블’이 인문과 과학의 영역을 넘나든다면 ‘나우’는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을 넘나들며 ‘4D 빅뱅 접근법’ 같은 최신 성과를 차분하게 소개한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작가정신/ 328쪽/1만3000원
엉뚱하고 강렬한 제목의 소설은 일단 독자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 소설의 내용이 완전히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 가까운 예로 스미노 요루의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섬뜩한 제목과 달리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이 소설에 한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소설 첫 문장부터 제목이 곧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두부다.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진 두부 파편. 아무리 봐도 시체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소설인가 싶지만, 의외로 정통 미스터리소설이다. 특이한 상황은 어느새 사건의 일부로 잘 녹아들어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해치지 않는다. 외려 부조리해 보이는 트릭과 복선이 추리 과정을 통해 정합적인 결론으로 짜맞춰져 더 매력적이다. 구라치 준은 일본의 중견급 미스터리 작가로, 이처럼 특이한 설정을 그렇지 않게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책에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외에도 ‘ABC 살인’ ‘사내 편애’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밤을 보는 고양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등 6편의 중·단편이 수록돼 있다.
내 삶에 스며든 헤세
강은교 외 지음/ 라운더바우트/ 500쪽/ 2만5000원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의 걸작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오거돈 부산시장,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 소설가 이외수, 시인 이해인, 음악평론가 임진모 등 사회 저명 인사 58명이 ‘헤세 문학이 내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나’를 주제로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내 삶에 스며든 헤세는 이렇게 탄생했다. 박노해 시인은 헌시에서 “열다섯, 외롭고 가난한 소년의 가슴에 어느 날 헤세가 걸어왔다. 헤세를 읽으며 보낸 그 겨울밤의 맑고 시린 바람 소리는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최악의 여성, 최초의 여성, 최고의 여성
나탈리 코프만 켈리파 지음/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344쪽/ 3만3000원
미투(Me Too)운동, 낙태 헌법 불합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꽤 높아졌는데도 오늘날 여성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320만 년 전부터 21세기까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여성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여성은 숱하게 많았다. 프랑스 예술사학자인 저자는 방대한 시간을 살펴 여성 100인의 이야기를 추려냈다. 과거 사회적 기준으로는 최악이라 평가받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성별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최초의 여성으로 이름을 남겼다. 서태후, 마리 퀴리, 시몬 드 보부아르, 메릴린 먼로,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익숙한 이름 외에도 인류 진보에 기여한 여성들의 삶이 시대별로 기록돼 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외과의사로 여성병원을 열었던 엘리너 데이비스 콜리, 최초로 남성 누드화를 그렸던 화가 수잔 발라동, 여성 최초로 랍비가 돼 성무일도를 집행한 리자이나 요나스, 여성 최초로 올림픽에서 우승한 테니스 선수 샬럿 쿠퍼 등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들 덕분에 후대 여성들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인물 가운데 여성의 몸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 선덕여왕도 포함돼 있어 흥미롭다.
그림 슬리퍼
크리스틴 펠리섹 지음/ 이나경 옮김/ 산지니/ 456쪽/ 1만8000원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 떨어진 ‘사우스 센트럴’은 흑인 거주 비율이 높은 슬럼가다. 1980~1990년대 이 지역에서는 강도, 마약, 살인, 그리고 갱단 범죄가 일상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러니 1985년 세 발의 총을 맞고 후미진 뒷골목에 버려진 흑인 여성의 시신에 경찰이나 언론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벌어진 10건 넘는 연쇄살인의 시작이었다. 언론이 ‘미모의 금발 여학생 실종 사건’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동안, 12년에 걸쳐 10여 명의 슬럼가 흑인 여성은 무자비하게 살해돼 거리에 내던져졌다. 범죄 전문기자인 저자는 이 의문의 연쇄살인마에 ‘잠들었던 살인마(The Grim Sleeper)’라는 이름을 붙이고 집중 보도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다. 그제야 흑인사회의 분노를 감지한 경찰은 서둘러 전담 수사팀을 본격 가동해 살인마를 쫓는다. 이 책은 10년에 걸친 연쇄살인마 추적기다. 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잔혹한 범죄자의 실체만은 아니다. 피해자 가족이 겪는 참담함과 만인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의 민낯 또한 가감 없이 드러난다. 과하게 흥분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게 죽음과 슬픔, 그리고 형사들의 집념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문체가 돋보인다.
용의 전쟁
최성환 지음/ 앤길/ 314쪽/ 1만8000원
각 문화권마다 다양한 상상의 동물이 있다. 그중 동서양을 막론하고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용. 책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용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일종의 용 백과사전인 셈이다. 단순히 글만으로는 다양한 용의 모습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에 저자가 직접 삽화를 그려 넣어 이해를 도왔다. 그렇다고 단순히 용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용에 숨겨진 다양한 상징을 역학, 사학, 기호학, 신학 등의 측면에서 상세히 분석해놓았다. 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한 저자는 이를 발전시켜 용과 관련된 새로운 인간심리 학설까지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