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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 찾은 유명 수제맥주 펍에서 혼자 공짜로 ‘웰컴 드링크’를 받아 시원하게 들이켜는 나 대리에게 오 사원이 묻는다. “아니, 대리님 지난주까지만 해도 투싼 타고 출근하시더니, 어제는 신형 쏘나타 끌고 나오셨더라고요? 혹시 집안에서 현대차 대리점 하세요?” 나 대리는 씩 웃으며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었다. 짙푸른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한 그루 나무를 그린 그림이 거실 한켠에 걸려 있었다.
“이 그림 어때? 지난 주말에 집에 새로 들였는데, 가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더라고.”
오 사원이 감상평을 내놓으려는 순간, 나 대리의 카카오톡이 ‘띵동’ 하고 울렸다. 거베라와 장미, 피토스포럼 등으로 구성된 작고 싱그러운 꽃다발이 지방 한 도시에서 근무하는 아내의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는 사진. ‘여보, 이번 주도 선물 고마워♡ 아 참, 오늘 밤에 수건 모아서 밖에 내놓는 거 잊지 마~’
“수건을 왜 집 밖에 내놔?” 워킹맘 윤 과장이 묻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호텔식 수건을 배송 받고 있거든요. 다 쓴 걸 내놓으면 업체가 수거해 가서 세탁해줘요.” 입이 떡 벌어진 윤 과장에게 나 대리가 말한다. “아 참, 저 내일 오후에 반차 씁니다. 두피 관리 예약을 해놔가지고….” 동기 김 대리가 핀잔을 준다. “무슨 남자가 매주 미용실에 가? 그건 그렇고, 저번 야유회 때 가져온 전통주는 어디서 구했어? 도수가 꽤 센 것 같은데 숙취는 없더라고.”
스타트업도, 대기업도 ‘도전’
나 대리가 아직 이용하지 않은 구독 서비스도 한둘이 아니다. 와인, 과일과 채소, 가정간편식, 샐러드, 면도날, 양말, 침구세트, 마스크팩, 수제맥주, 커피원두, 의류, 취미용 소품도 구독할 수 있다. 교통수단도 구독 서비스 개념을 도입하는 추세다. 우버, 리프트는 미국 일부 도시에서 수요가 많을 때 일시적으로 요금이 올라가는 ‘서지 프라이싱(Surge Pricing)’을 적용받지 않으면서 이용 요금을 할인받는 유료 구독 서비스를 내놓았다. 국내 차량공유업체 쏘카도 최근 우버의 서비스와 비슷한 ‘쏘카패스’를 회원 1만 명 모집으로 한정 출시했다. 월정액을 내면 쏘카 전 차량을 차종이나 횟수 제한 없이 50%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최근 공유 전동킥보드 ‘씽씽’을 내놓은 펌프도 향후 월정액을 내고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이다.
‘오픈갤러리’는 3개월마다 원화를 교체해주는 그림 구독 서비스를 제공한다(왼쪽). 월정액제 미용실 ‘월간헤어’의 김정수 대표원장이 미용실 ‘구독자’에게 미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오픈갤러리 ⓒ시원상]
구독 경제는 스타트업의 주요 도전 영역 가운데 하나다. 제휴를 맺은 200여 개 술집(주로 맥주를 파는 펍과 위스키, 칵테일 등을 파는 바)에서 무료 웰컴 드링크를 한 잔씩 제공받을 수 있는 ‘데일리샷’, 원화(原畵)를 3개월마다 바꿔 걸어주는 ‘오픈갤러리’, 2주 혹은 4주 단위로 꽃을 배송해주는 ‘꾸까’, 호텔식 수건을 매주 현관문 앞에 갖다 주는 ‘노블메이드’, 월 구독료를 내면 한 달 내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미용실 ‘월간헤어’ 등은 모두 설립된 지 짧게는 1년 미만, 길어야 5년 정도 된 회사들이다.
그렇다고 구독 서비스를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겁 없는 스타트업만 도전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여기는 것은 오해다. 2017년 미국에서 먼저 하이브리드 자동차 아이오닉 구독 서비스를 선보였던 현대자동차는 최근 국내에 ‘제네시스 스펙트럼’과 ‘현대셀렉션’이라는 자동차 구독 시범 서비스를 개시했다. 월 구독료를 내면 제네시스 스펙트럼은 제네시스 브랜드 전 라인업을, 현대셀렉션은 쏘나타, 투싼, 벨로스터 3개 차종을 선택해 탈 수 있다. 자신이 원할 때 차종을 바꿔도 된다. 롯데렌터카도 최근 국산 및 수입 자동차를 맘대로 바꿔 탈 수 있는 구독 서비스 ‘오토체인지’를 내놨다. 아모레퍼시픽의 ‘스테디’는 마스크팩을, 애경산업의 ‘플로우’는 기초화장품 및 목욕제품을 정기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강경식(37) 씨는 정수기, 음식물처리기, 넷플릭스, 그리고 그림에 대해 월정액을 지불한다. ‘오픈갤러리’에 매달 3만9000원을 내고 10호 사이즈(50×45cm) 그림을 빌려 주방에 걸어놓고 식사할 때마다 감상한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신혼 때는 집안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그림을 선택했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꽃이나 동물이 그려진 그림을 고른다. 강씨는 “멀게만 느껴지던 원화를 집 안에 걸어놓고 때때로 감상할 수 있는 데다, 아이도 그림을 좋아해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취향 중시 2030세대가 주로 이용
‘데일리샷’ 구독자는 가맹 펍에서 하루에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최근 데일리샷과의 제휴를 개시한 수제맥주 펍 ‘더부스’의 매장. ‘벨루가’는 2주 간격으로 수제맥주를 집으로 배송해준다(왼쪽부터). [사진 제공 · 데일리샷 · 더부스 ·벨루가 홈페이지]
구독 경제에서 편리한 서비스와 높은 ‘가성비’는 기본이다. 현대셀렉션의 경우 기존 렌털·리스와 달리 수수료 없이 언제든 자유롭게 서비스를 해지할 수 있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간편하게 차량 예약이 가능하다. ‘데일리샷’ 구독료는 월 9900원. 한 달에 두어 번만 웰컴 드링크를 이용해도 ‘본전’을 뽑는다.
‘가성비’는 기본, ‘가심비’까지 만족시켜야
면도날, 과일, 호텔식 수건을 정기 배송하는 업체들(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와이즐리 홈페이지, 만나박스 홈페이지, 노블메이드 홈페이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개시한 오픈갤러리 이후 몇몇 업체가 ‘그림 구독’ 서비스를 선보이다 사라졌다. 홍지혜 오픈갤러리 큐레이터는 “우리 서비스는 매년 구독자 수가 2배가량 뛸 정도로 성장 중”이라며 “큐레이터 10여 명이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꾸준히 발굴하고, 고객의 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해 어떤 그림을 어디에 걸면 좋을지 컨설팅해주는 등 서비스 차별화를 위해 노력한 점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셀렉션 관계자는 “무엇보다 고객 선호도가 높은 차종과 최근 출시된 차종 위주로 서비스를 구성하고, 여러 명이 이용하는 차량인 만큼 차량 상태와 청결도를 최상으로 관리해야 고객 만족이 유지된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성 고객’이 오히려 치명타 될라
현대자동차가 시범 서비스 중인 자동차 구독 서비스 ‘제네시스 스펙트럼’(왼쪽)과 ‘현대셀렉션’. [사진 제공 · 현대자동차]
일례로 미국 ‘무비패스’는 월 9.95달러에 매일 한 편씩 극장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를 선보여 30만 명 이상 구독자를 확보하는 등 크게 성공했지만, ‘영화광’들의 적극적인 이용 탓에 비용이 많이 들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무비패스가 영화관과 협력 모델을 만들지 않고, 영화관으로부터 티켓을 사 고객에게 제공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 패착이 됐다고 지적한다. 임 교수는 “다만 항공, 기차, 호텔, 극장 등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상품·서비스(Perishable Goods)는 구독 서비스를 도입해 매출 증대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영철도회사(SNCF)는 차량공유 서비스 이용자가 많아져 수익이 줄자, 청년을 대상으로 한 달에 79유로(약 10만5000원)를 내면 무제한으로 기차에 탑승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해 성공을 거뒀다. 미국 ‘서프웨어’는 미 서부와 유럽 일부 국가에서 월 2000달러(약 240만 원)에 비행기 무제한 탑승이 가능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도 이러한 구독 경제의 ‘허들’을 뛰어넘고자 노력한다. 김민욱 데일리샷 대표는 “웰컴 드링크를 제공받을 때 안주나 술을 추가 주문하는 것이 의무로, 이를 통해 가맹점주들의 비용 부담을 줄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3개 직영점(서울 경리단점·건국대점·광화문점)을 동시에 데일리샷에 합류시킨 수제맥주 펍 ‘더부스’의 이남경 리테일팀장은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추가 주문이 들어온다면 업주 입장에서도 큰 부담은 아니고, 오히려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태훈 월간헤어 COO는 “미용실업계가 인센티브제로 운영되고 있어 고객에게 추가 시술이나 고가 제품을 강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타개하려고 직원에게 월급을 주는 월정액 미용실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다양한 구독 상품을 개발하는 동시에 커피도 마시고 문화생활도 할 수 있는, 미용 서비스를 기본으로 하는 라이프스타일 거점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