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욱의 술기로운 생활

‘숙성 막걸리’를 아시나요

막 거른 막걸리의 역주행  …  한 달 넘게 숙성시켜 묵직하고 부드러운 맛

  •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blog.naver.com/vegan_life

    입력2019-03-19 11: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술이 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받아오던 술, 농촌에선 새참과 함께 내오던 술, 허기질 때 밥 대신 마시기도 하던 술, 막걸리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와 넉넉한 크기의 사발은 막걸리의 상징과도 같다. 늘 이런 모습일 것 같던 막걸리가 최근 수년 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서민의 술’ 막걸리가 미식 영역에 기품 있게 등장하고 있다. 가격도 병당 1만~5만 원으로 꽤 비싼 편. 이들 막걸리는 대부분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이 글에서는 ‘숙성 막걸리’라고 부르기로 한다.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지하 식품관에 위치한 ‘우리술방’. [사진 제공 · 신세계백화점]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지하 식품관에 위치한 ‘우리술방’. [사진 제공 · 신세계백화점]

    막걸리는 빠르고 거칠게 막 걸러서 신선한 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막걸리의 발효 기간은 2주 전후. 고급 발효주인 약주와 청주가 각각 100일가량, 증류식 소주가 1년간 숙성되는 것에 비해 막걸리는 매우 빨리 만들어지는 주종이다. 음식 메뉴로 비유하자면 샐러드, 치즈로 비유하자면 우유 풍미가 가득한 모차렐라라 하겠다. 다시 말해 막걸리는 원료 자체의 맛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앞에 ‘생(生)’자 붙이기를 고집하는 막걸리가 많다. 

    그런데 신선함을 추구하는 막걸리가 변하고 있다. 신선함과 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숙성’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발효는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과정이다. 효모가 당분을 먹으면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숙성은 이 알코올의 맛을 극대화하려고 거치는 과정이다. 알코올이 일부 증발하면서 풍미가 농축되고, 알코올 분자와 물 분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매끄러운 물질을 형성해 맛이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일본 청주보다 쌀 많이 쓰기도

    [shutterstock]

    [shutterstock]

    그간 막걸리업계에서는 거의 숙성을 하지 않았다. 다른 술과 달리 막걸리 자체에 영양성분이 많아 숙성시키다 맛이 쉽게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반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6도 전후인데, 알코올을 식초로 바꾸는 초산균이 가장 좋아하는 도수다. 막걸리를 숙성시키려다 식초가 될 위험이 있는 셈. 따라서 막걸리는 숙성을 거의 하지 않거나 일주일 이내로 지극히 짧다. 



    참고로 막걸리의 진짜 알코올 도수는 6도가 아니다. 원액은 15도 전후로 와인과 비슷하다. 원액에 물을 넣는 ‘가수(加水)’ 과정을 거쳐 도수를 낮춘다. 1970~80년대 막걸리가 노동주로 본격 활용되면서 도수가 높은 술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고, 이에 정부가 아예 막걸리 도수를 제한했다. 막걸리가 ‘숙성시키지 않은 신선한 술’이 된 데는 정부 규제도 한몫한 셈이다. 

    막걸리를 숙성시키려면 오래 보관해도 상하지 않도록 저장성을 강화해야 한다. 먼저 높은 알코올 도수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주원료인 쌀을 많이 써야 한다. 쌀을 많이 사용하는 술로 유명한 것은 일본 청주(사케)다. 일본 청주는 쌀의 1.4배에 해당하는 물만 넣는다. 쌀의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최근 등장한 한국의 숙성 막걸리는 일본 청주보다 물을 더 적게 넣기도 한다. 일례로 경북 문경주조의 숙성 막걸리 ‘문희’는 쌀 100g에 물은 30~40㎖만 넣는다. 

    숙성 막걸리는 원료가 신선하지 않다면 숙성 과정에서 산패하기 쉽다. 그래서 숙성 막걸리는 양조장과 가까운 곳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사용한다. 술이 좋다는 것은 곧 지역 농산물이 좋다는 뜻이 된다. 원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고자 인공감미료도 사용하지 않는다.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 견인 기대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전통주업계의 오래된 통념 가운데 하나는 ‘술은 그 집에 사는 귀신이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귀신이란 미생물, 즉 효모를 가리킨다. 한국 주류산업은 대부분 효모를 수입에 의존해 늘 정체성 논란이 뒤따르는데, 최근 등장한 숙성 막걸리들은 토종 효모나 재래 누룩을 사용한다. 그래서 각각의 맛에 개성이 있다. 마치 가정간편식(HMR)이 아닌, 셰프가 만들어준 요리 같은 느낌이다. 

    우리도 원래 청주처럼 오랜 숙성을 거치는 전통주 문화를 갖고 있다. 숙성 막걸리를 통해 막걸리에도 ‘새로운 복고’, 뉴트로(Newtro) 현상이 나타나는 셈이다. 문정훈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 교수는 “숙성 막걸리가 막걸리 고급화 및 다양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금까지 막걸리는 생산시설 표준화를 통해 품질을 상향하며 발전해왔다. 그런데 숙성 막걸리가 등장하면서 막걸리도 숙성 연한에 따라 리저브(Reserve) 와인처럼 한 브랜드에서 비싼 값을 받는 술이 나올 수 있게 됐다. 숙성 막걸리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과 맛을 즐기는 새로운 시장도 열릴 수 있다. 문 교수는 “조만간 ‘빈티지 막걸리’가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된다”고도 말한다. 

    현재 시중에는 한 달 이상 숙성시킨 프리미엄 숙성 막걸리가 수십여 종 출시돼 있다. 단맛이 나는 제품이 많은데 인공감미료의 단맛이 아니라 쌀이 주는 단맛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단맛이라도 물리기 쉬워 오래 즐기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는 숙성 막걸리의 맛이 다양해지길 기대한다. 숙성 막걸리 인증 제도가 새롭게 도입되면 어떨까 싶다. 소비자의 이해를 높이고, 생산자의 의욕을 자극하는 계기도 돼 숙성 막걸리 문화가 더 확산되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숙성 막걸리 추천
    名人 항아리에서 숙성
    양조상서 시음 체험도 가능

    숙성 막걸리는 전통주 전문점 또는 한식 주점 등에서 즐길 수 있다. 시음 기회를 마련한 양조장도 있다. 다만 모두 수제로 제조되기 때문에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많은 곳에서 판매되진 않고 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확인, 구매하는 것이 좋다.

    문경주조 ‘문희’
    쌀 100g에 물은 30~40㎖만 넣어 빚기 때문에 단맛이 진하다. 부드러운 질감도 일품. 경북 무형문화재인 상주옹기장의 정대희 명인이 만든 항아리에서 100일 이상 숙성시킨다. 문경의 ‘오미자 특구’ 동로면에서 빚는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돼 양조장 견학 및 시음 체험도 할 수 있다. 

    용량 500㎖ / 알코올 도수 12도 / 소비자가 2만 원 전후 
    주소 경북 문경시 동로면 노은리 192
    단맛 ●●●●● 신맛 ●●●○○ 쓴맛 ●●○○○ 과실향 ●●●○○


    송도향전통주조 ‘삼양춘’ 

    인천 송도향전통주조가 생산한다. 멥쌀과 찹쌀의 조화를 통해 적절히 드라이한 맛을 추구한다. 특히 발효 과정을 3번이나 거쳐 깊은 풍미와 긴 여운을 자랑한다. 강화도의 쌀과 전통 누룩으로 100일간 숙성시킨다. 2018년 대한민국 주류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양조장 안에 시음장이 있어 삼양춘 외에 다양한 제품을 맛볼 수 있다. 

    용량 500㎖ / 알코올 도수 12.5도 / 소비자가 1만2000원 전후
    주소 인천 연수구 컨벤시아대로80 401동 144호
    단맛 ●●●○○ 신맛 ●●●○○ 쓴맛 ●●●○○ 과실향 ●●○○○


    자희향 ‘탁주 자희향’ 

    ‘스스로 향을 내며 기뻐한다’는 의미를 가진 자희향(自喜香)은 2014년 삼성 회장단 생일 만찬 건배주로 선정된 바 있다. 원료는 찹쌀 베이스의 죽. 죽으로 술을 빚는 이유는 다양한 과실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러한 기법을 ‘석탄주(惜呑酒)’ 기법이라고 하는데, ‘향이 너무 좋아 넘기기 애석하다’는 뜻이다. 풍부한 과실향과 감미로운 목 넘김이 장점이다. 

    용량 500㎖ / 알코올 도수 12도 / 소비자가 1만6000원 전후
    단맛 ●●●●○ 신맛 ●●●○○ 쓴맛 ●●○○○ 과실향 ●●●●○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