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안에서 볼게리 마을로 이어지는 사이프러스 길. 2 레리치 해안 마을 전경. [사진 제공 · 김상미]
이탈리아에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와인은 슈퍼 투스칸(Super Tuscan)이다. 슈퍼 투스칸은 토스카나에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같은 프랑스 보르도 품종의 포도로 만든 레드 와인이다.
슈퍼 투스칸의 시작을 주도한 도시 볼게리는 토스카나 해안으로부터 약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해안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직선 도로는 양옆으로 곧게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장관이다. ‘사이프러스 길(Viale dei Cipressi)’이라고도 부르는 이 길은 이탈리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조수에 카르두치가 쓴 ‘산귀도 교회 앞에서(Davanti San Guido)’라는 시의 배경이기도 하다.
길 끝에 위치한 볼게리는 세계적 명성과 달리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한 시간 정도 마을을 천천히 둘러본 뒤 점심식사를 위해 와인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에노테카(Enoteca)에 무작정 들어섰다. 토스카나의 경우 어디든 맛있다는 것을 이미 체험한 터라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종류별로 다양한 음식을 고르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도 한 병씩 주문했다. 화이트 와인은 가야(Gaja)의 ‘비스타마레(Vistamare)’였다. 비스타마레는 이탈리아어로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라는 뜻이고, 레이블의 삼각형 무늬는 사이프러스 길의 원근을 묘사한 것이다. 베르멘티노(Vermentino), 비오니에(Viognier), 피아노(Fiano) 포도를 섞어 만든 비스타마레의 풍부한 향과 매끄러운 질감은 햄과 치즈로 구성된 애피타이저와 무척 잘 어울렸다.
이어 주문한 레드 와인 ‘일 피노(Il Pino)’는 토스카나의 명품 오르넬라이아(Ornellaia)와 마세토(Masseto)를 탄생시킨 거장 로도비코 안티노리(Lodovico Antinori)가 만든 와인이다.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이 섞이면서 빚어낸 일 피노의 진한 과일향과 부드러운 타닌은 메인 요리인 토스카나식 멧돼지 요리와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줬다.
슈퍼 투스칸의 탄생지 볼게리
3 볼게리의 에노테카에서 즐긴 애피타이저와 비스타마레, 일 피노 와인. [사진 제공 · 김상미]
현지인의 추천으로 찾아간 곳은 작은 호텔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문어, 새우, 홍합 등으로 만든 전채요리를 시작으로 해산물 리소토와 파스타를 거쳐 생선 요리로 마무리한 점심은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최고의 식사였다. 여기에 곁들인 와인은 베르멘티노로 만든 화이트 와인 ‘사르티콜라(Sarticola)’와 ‘오로 디제(Oro d’Isee)’였다. 베르멘티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재배되지만 리구리아의 깎아지른 경사면에서 생산된 것이 맛과 향이 가장 뛰어나다. 사르티콜라의 농익은 과일향은 문어의 담백함과 잘 어울렸고, 오로 디제의 상큼함은 해산물 파스타의 감칠맛과 멋진 시너지 효과를 선보였다.
4 봉골레 스파게티와 오로 디제 와인. 5 해산물 전채요리와 사르티콜라 와인. [사진 제공 · 김상미]
키안티와 현지 음식의 조화를 제대로 맛본 곳은 8대째 이어오는 정육점 겸 레스토랑이었다. 피렌체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가운데 화덕을 중심으로 긴 테이블에 앉아 모두 함께 식사하는 구조다. 식당에 도착하면 1층 정육점에서 돼지 지방 버터를 얹은 빵과 토스카나식 햄을 애피타이저로 즐기며 식사가 시작된다. 2층에서 진행되는 디너에서는 신선한 육회부터 티본스테이크까지 소 부위별로 만든 다섯 가지 요리를 차례로 맛볼 수 있다.
6 피렌체의 한 정육점 겸 레스토랑 1층에 마련된 각종 애피타이저. 7 티본스테이크와 키안티 와인. [사진 제공 · 김상미]
여행 마지막 날을 장식한 것은 비비 그라츠(Bibi Graetz)였다. 비비 그라츠는 세계적 명품 ‘콜로레(Colore)’와 ‘테스타마타(Testamatta)’를 탄생시킨 와이너리로, 이탈리아 토착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든다.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곳이지만 필자가 지난해 8월 비비 그라츠를 취재한 인연이 있어 특별 방문을 허락받았다.
토착 품종 와인의 진수, 비비 그라츠
8 와이너리를 안내하고 있는 빈첸초 단드레아 비비 그라츠 마케팅 이사. 9 와인을 블렌딩 중인 비비 그라츠의 와인메이커 프란체스코 바카로. 10 토스카나식 육회 요리와 볼라마타 로제 스파클링 와인. [사진 제공 · 김상미]
빈첸초 단드레아(Vincenzo D’Andrea) 비비 그라츠 마케팅 이사의 안내로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와인을 맛보았다. 와인은 밭 위치와 고도별로 각기 다른 통에서 숙성되고 있었는데, 같은 품종임에도 모두 다른 맛이 나는 것이 신기했다. 단드레아는 “이렇게 다양한 맛이 섞여야 복합적이고 풍부한 향미의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단드레아와 함께 한 점심식사에서는 비비 그라츠의 화이트 와인과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산지오베제로 만든 로제 스파클링 와인 ‘볼라마타(Bollamatta)’의 신선한 베리향은 토스카나식 육회의 담백함과 맛깔스러운 궁합을 이뤘다. 메인으로 나온 생선 요리에는 ‘부지아(Bugia)’를 곁들였다. 부지아는 토스카나 앞바다의 질리오 섬에서 자란 안소니카(Ansonica)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사과향이 산뜻하고 조개껍데기 같은 미네랄향이 은은해 생선 요리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토스카나를 여행하며 가장 놀랐던 것은 인당 20~30유로(약 3만8200원)만으로도 얼마든지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만족도였다. 예술과 와인의 고장 토스카나에서 보낸 일주일은 눈과 입이 모두 즐거운 완벽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