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 투수 오승환(콜로라도 로키스)은 변화구로 슬라이더를 주로 던진다. (왼쪽),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뉴시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에는 전체 투구 가운데 7.2%를 타자가 헛쳤습니다. 올해 9월 10일 현재 이 비율은 10%가 됐습니다. 2.8%p 차이라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지난해 프로야구에서 투수가 던진 공은 총 19만7918개. 이 가운데 2.8%면 약 5542개입니다.
헛스윙이 늘어나면 삼진도 증가합니다. 이날까지 올해 프로야구 전체 4만7210타석 가운데 18.8%(8858타석)가 삼진으로 끝났습니다. 37년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그리고 이 삼진 가운데 77.4%는 타자가 헛스윙해 나왔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헛스윙 비율이 11.6%로 더 높습니다. 메이저리그도 10년 전에는 이 비율이 9.1%였는데 오르고 올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과도 마찬가지.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는 전체 타석 가운데 22.2%가 삼진으로 끝났습니다. 참고로 안타를 친 타석도 22.2%입니다.
일본 타자들은 다릅니다. 현재 일본 프로야구 헛스윙 비율은 7.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들 역시 유행을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삼진으로 끝난 타석 비율이 2008년 17.6%에서 올해 18.9%로 올랐거든요.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헛스윙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손가락 벌렸죠? 스플리터예요
메이저리그에서 1988년부터 20년 동안 뛰면서 삼진 3116개(역대 15위)를 기록한 커트 실링(52). 독설가로 유명한 실링은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1895~1948)와 세 타석 승부를 벌인다면 세 타석 모두 삼진을 잡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루스는 스플리터가 뭔지 모를 테니까.”
한국에서 ‘반(半)포크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스플리터는 속구처럼 날아오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떨어지는 구종입니다. 스플리터를 대중화한 건 1976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브루스 수터(65). 물론 전에도 비슷한 공을 던지는 투수가 없던 건 아니지만 수터가 이 구종을 앞세워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하자 스플리터는 비로소 명성을 떨치게 됐습니다.
스플리터는 수터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으로 이끌었습니다. 커리어에 선발 등판이 한 번도 없는 투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건 수터가 처음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가면 볼 수 있는 수터의 전기(傳記) 동영상도 스플리터를 ‘혁명적인 새 구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공을 처음 접한 당시 타자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꼈을 건 당연한 일. 그러니 1935년 은퇴한 루스도 이 공을 처음 보고 마구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2018년에도 스플리터는 여전히 치기 힘든 공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 투수가 던진 스플리터는 현재까지 총 9297개. 이 가운데 18.9%(1754개)가 헛스윙으로 연결됐습니다. 메이저리그 전체 헛스윙 비율이 11.6%이니까 스플리터는 헛스윙 비율을 62.9% 끌어올리는 셈입니다.
스플리터와 포크볼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포크볼이 이런 구실을 합니다. 한국 프로야구 공식 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프로야구 타자들은 올해 전체 포크볼 가운데 15.4%를 헛쳤습니다. 한국에서도 포크볼이 리그 평균보다 헛스윙 비율을 50% 넘게 끌어올린 셈입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포크볼이 헛스윙을 가장 많이(19.1%) 유도한 구종입니다.
그런데 스플리터나 포크볼은 아무나 던질 수 있는 공은 아닙니다. 올해 프로야구에서 전체 투구 가운데 포크볼의 비중은 현재까지 6.9%가 전부입니다. 메이저리그는 더합니다. 스플리터와 포크볼을 합쳐도 1.5%밖에 되지 않습니다. 메이저리그에는 투수 유망주에게 아예 스플리터를 던지지 못하게 하는 구단도 적잖습니다. 스플리터를 던지면 팔꿈치 등에 부상이 잦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오타니 쇼헤이(24·LA 에인절스)가 토미 존(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권고받은 것도 스플리터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현재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삼는 투수들이 은퇴하고 나면 포크볼이 이미 그런 것처럼, 스플리터는 메이저리그에서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포크볼을 던진 건 일본 출신 다자와 준이치(32·LA 에인절스) 딱 한 명뿐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이렇게 1980년대 대표 구종으로 손꼽히던 스플리터가 사라지는 자리를 슬라이더가 야금야금 차지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더도 한때 팔꿈치 부상 주범으로 손꼽히던 구종이지만 오해가 풀리면서(?) 슬라이더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2015년 메이저리그에서는 전체 투구 가운데 14.8%가 슬라이더였는데 올해는 16.8%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에서 슬라이더는 헛스윙 유도율 16.9%로, 스플리터(18.9%) 다음으로 헛스윙을 많이 끌어낸 구공입니다.한국 투수들이 선택한 건 체인지업입니다. 2015년 8.2%이던 체인지업 비중은 올해 현재 10.5%까지 늘었습니다. 이제 한국 프로야구 투수들은 커브(10.1%)보다 체인지업을 더 많이 던집니다. 효과도 뛰어납니다. 체인지업은 헛스윙 유도율 15.7%로 포크볼(15.4%)보다도 좋습니다. 물론 일본은 여전히 ‘포크볼 천국’입니다. 올해 현재까지 일본 프로야구 1군 무대 투구 기록이 있는 297명 가운데 195명(65.7%)이 포크볼을 1개 이상 던졌습니다. 이 중 17명은 전체 투구 가운데 30% 이상이 포크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구는 구질만 변화무쌍한 게 아닙니다. 변화구 자체에도 유행이 있고, 리그(동네)마다 유행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유행 때문에 때로는 억울하게 엮이는 일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스플리터와 포크볼을 같이 묶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분명 있을 겁니다.
사실 어떤 공이 스플리터고, 어떤 공이 포크볼인지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김정준 SBS Sports 야구해설위원은 “스플리터, 포크볼, 투심(패스트볼)은 사실 구분하기 어렵다. 진짜 포크볼은 회전이 없어야 하는데 요즘 포크볼이라고 부르는 공은 그런 것 같지 않다”며 “구종은 던지는 선수가 이름 붙이는 게 정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항상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정작 공을 치는 타자 중에는 “나는 직구 아니면 변화구로만 구분한다”는 이가 적잖습니다. 그러고는 타석에 들어서 헛스윙으로 삼진을 먹고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그게 잘못된 건 또 아닙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파우스트’에 쓴 것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은 헤매기 마련”이니까요. 올해 현재 한국 프로야구 타석당 홈런 비율은 3.0%로 1999년(3.1%)에 이어 역대 2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스윙’을 하다 보니 헛스윙도 많고 홈런도 많은 겁니다.
그렇게 야구와 인생이 서로 또 닮아갑니다. 그러니 요즘 헛스윙을 너무 많이 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헛스윙이 두려워 아예 스윙을 그만둔다고 공이 절로 와 맞는 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