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밀집지역인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는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조선족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조선족이 늘었다. [조영철 기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K씨는 아낌없이 돈을 풀었다. 음식도 예식장에서 제공하는 코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하고, 주류와 바비큐도 추가로 주문했다. 또 하루 종일 치르는 중국식 결혼풍습에 따라 2차, 3차까지 따로 준비했다. 결혼식 당일에 쓴 돈만 2000만 원에 이르렀다. 아들의 유럽행 신혼여행 경비와 웨딩촬영 비용까지 합하면 3000만 원은 족히 들었다. K씨는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을 후회 없이 치르고 싶었다. 결혼식장도 여러 군데 방문해보고 강남으로 잡았다. 신경 쓴다고 썼는데도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큰일을 치렀으니 한동안 걱정할 일이 없어 좋다”고 말했다.
올해 57세인 K씨는 중국 지린성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경북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피난을 갔다 정착했고, 해방 후 귀국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같이 온 이웃 수십 가구가 함께 자리 잡은 탓에 귀국보다 자연스레 남는 쪽을 택했다.
1961년 태어난 K씨는 조선족 학교를 다니며 한국말을 배웠고, 정규 교육을 마친 뒤 집안일을 돕다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아들을 낳고 아내와 생계를 꾸렸지만 중국의 경제발전은 더뎠다. 반면 한국은 일자리가 넘쳤고 벌이도 괜찮았다. 2000년대 초 마흔 살이던 K씨는 10대 아들을 부모에게 맡긴 채 아내와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서 이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사장 인부, 가사 도우미, 음식점 보조 등이 전부였지만 악착같이 일해 차곡차곡 모은 돈을 중국으로 보냈다.
강남에서 자식 혼사 치른 50대 조선족
그렇게 17년을 일한 끝에 K씨는 한국 중산층에 편입했다. 10년 전 지린성에 사뒀던 집값이 2배로 올랐고, 5년 전 서울 구로구에 사둔 아파트도 가격이 억 단위로 뛰었다. 대입을 앞둔 아들을 중국에서 데려와 한국 대학에 입학시킨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사업을 시작해 30대 초반인 지금은 직원 대여섯 명을 거느린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수 있어 양국 유학생을 돕는 일로 시작한 유학원 사업이 이제는 꽤 자리 잡았다. 사업이 잘돼 신혼집도 아들이 성동구에 스스로 마련했다.그사이 K씨 가족은 한국 국적도 취득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어머니를 모셔와 한국 국적을 회복하도록 했고, K씨와 아내도 귀화해 아들을 호적에 올렸다. 그는 “자식뿐 아니라 조카들 교육비까지 댔으니 힘들긴 했다. 그래도 떳떳하게 살아왔고 이제는 걱정거리 하나 없다. 노후 준비도 나 나름대로 해놨다. 앞으로는 소일거리를 하면서 건강 잘 챙기고, 아내와 여행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1세대 조선족은 방문취업제 도입 이후 안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해 11년이 지난 지금 한국 중산층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개중에는 꾸준히 모은 돈으로 부동산 투자, 사업 등을 시작해 부유층으로 올라선 이도 적잖다. 특히 30, 40대인 2세대 조선족은 부모 세대의 어려움을 답습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해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식자재 도매 사업체 ‘한중식품’을 운영하는 김봉규(40) 사장도 그런 사례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18년 만에 종합소득세 8000만 원을 납부하는 갑부가 됐다. 전국적으로 500여 개 음식점을 대상으로 양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등 식자재를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매달 수억 원대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김 사장은 “한국에 먼저 와 자리 잡은 부모님이 와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한 게 벌써 18년이 됐다.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중국에 있었다면 더욱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중국 선양 출신인 김 사장은 중학교 졸업 후 고교 진학 대신 중국 인민군에 입대해 4년간 근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000년 인민군 출신 중국인은 중국 공산당 소속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김 사장도 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고향이 전남 진도이고, 부모도 한국에 있던 터라 한국행을 택했다.
소득세 8000만 원 내는 사업가도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식자재 도매 회사를 운영하는 김봉규 사장은 사업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매월 수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성공했다. [조영철 기자]
피곤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자주 가던 중국식품 가게 주인이 그에게 운전기사를 알선해달라고 했다. 한 달에 150만 원가량 버는 일이었지만 일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김 사장이 선뜻 나섰고 그렇게 몇 달 일하자 주인이 그에게 가게 인수를 제안했다. 권리금 5000만 원이 없어 망설였지만 주인이 “일부만 내고 나머지는 벌면서 갚으라”고 선의를 베풀어 결국 가게를 인수했다.
그때부터 일이 풀렸다. 김 사장은 화교들이 주방장으로 있는 음식점을 찾아가 업무시간 이후 술을 사며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싹싹한 김 사장을 마음에 들어 한 주방장들은 거래처를 수십 곳씩 소개해줬고 가게 인수 1년 만에 한중식품 매출은 2배로 늘었다. 김 사장은 “인수 당시에는 월매출이 1000만 원 단위였는데, 2~3년 뒤 월매출 1억 원을 넘겼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4~5배로 뛰었다”며 미소 지었다.
김 사장은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에게 구로동에 아파트를 사드리고, 2년 전에는 노후 자금 명목으로 원룸 12개짜리 다세대 건물까지 부모 명의로 매입했다. 자신 역시 구로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로2동 사회복지관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등 지역사회 봉사도 하고 있다.
조선족 특유의 억양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김 사장은 일찌감치 한국 국적을 취득한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려 어엿한 한국인이 된 지 오래다. 그는 “3년 전 연예인기획사업, 통신사업 2개가 망하는 바람에 5억 원을 날리긴 했어도 지금도 먹고살 만하다. 한국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 나도 한국에 보은하며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성공한 조선족은 공통점이 있었다. 조선족 밀집지역인 서울 구로동과 대림동 등에서 조선족을 상대로 음식점, 여행사, 식품점 등을 운영해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다. 냄새 나지 않는 깔끔한 양꼬치로 인기를 얻어 전국에 60여 개 체인점을 연 요식업 사업가, 여행사와 휴대전화 할인매장 같은 사업체를 너덧 개 운영하며 2억 원짜리 마세라티 스포츠카를 모는 사업가 등 저마다 근성을 갖고 성공한 조선족을 취재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박사학위를 따려고 한국에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해 한중무역협회를 이끌게 된 김용선 회장. [김용선]
그런데 서울대 지구환경과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옌볜 출신 아내를 만나 2006년 결혼한 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이가 생겨 중국에 있는 처갓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이를 낳자 둘 중 하나는 학업을 미룰 수밖에 없었고, 김 회장이 잠시 육아를 맡았다. 그사이 아내는 박사학위를 취득해 서울대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됐다.
부부 박사, 한중무역협회장·연구원으로
각종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서울명예시민이 된 허을진 GK희망공동체 이사장(오른쪽). [허을진]
그가 다방면으로 일하는 사이 아내 이선란 박사는 국립기상과학원 기후연구과에 채용돼 연구용 기상항공기를 이용한 온실가스 관측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김 회장은 “공부를 포기하고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돈에 큰 관심이 없어 결국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동포들을 위해 헌신하고, 대중국 무역을 하는 한국인의 외화벌이에 일조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에 대해서도 “아무나 일할 수 없는 국립기상과학원에 조선족 출신으로 들어갔으니 나보다 더 성공한 셈”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조선족은 대체로 한국 정부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2005년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 개정, 2007년 방문취업제도 시행 등으로 당시 불법체류 신분이던 중국동포들의 지위를 합법적으로 보장해줘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것. 또한 2010년 동포기술교육제도를 시행해 자격증 취득 뒤 취업할 수 있도록 동포교육지원단을 만들어준 것 역시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보답하려는 조선족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여행사와 서류대행 사업을 하는 천춘옥 명촌여행사 대표는 “8년 전 한국에 들어와 사업을 시작하고 부모님과 자식까지 뒷바라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 정부의 좋은 정책들 덕분이다. 중국동포들이 이렇게 정책적인 부분에서 배려받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들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시각을 개선하고, 배려받은 만큼 지역사회에 보답하는 것을 숙제로 생각했다. 허을진 GK희망공동체 이사장 역시 부채감을 덜고자 비영리단체를 만든 경우다. 그는 2007년 방문취업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자동차 회사에서 번 돈으로 중국동포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온라인매체를 만들었고, 4년 전에는 중국동포와 한국 사회를 잇는 GK희망공동체를 설립했다.
허 이사장은 중국 옌볜의 불우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보내고, 매년 중국과 한국의 청소년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문화행사를 개최하며, 한국에서 지역 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공로로 2015년 10월에는 서울명예시민으로 선정됐다. 그는 “지역사회 단체에 후원하려는 중국동포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물품 후원이 많다 보니 재단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중국동포들과 함께할 수 있는 한 꾸준히 봉사하면서 한국 생활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잘나가는 조선족
연매출 1000억 원 이상 기업인 수십명,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 등
1월 5일 쿵쉬안유 중국 외교부 부부장 겸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열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중 6자회담 수석대표 협의에서 모두발언하는 모습. [뉴시스]
현재 중국 내 연매출 1000억 원을 기록하는 기업의 조선족 대표도 상당수다. 7월 4일 베이징에서 ‘제1회 중국 한상 CEO(최고경영자) 포럼’이 개최됐다. 포럼을 주관한 재외동포재단의 오상호 한상사업부 대리는 “이번 포럼에는 연매출 1000억 원 이상 기업의 CEO 23명이 초청됐다. 아가방앤컴퍼니와 의류업체를 소유한 랑시그룹을 비롯해 전자제품 생산회사, 의약품 제조회사, 호텔골프장 운영회사 등 중국 전역을 무대로 사업하는 기업가들이다. 중국에서 성공한 조선족 기업가의 전체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초청된 CEO들은 중국 내 한상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북한을 대상으로도 사업하고 있다. 그래서 이날 포럼에는 조선족 기업가들이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경제협력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오 대리는 “포럼 주제는 중국 내 동포 간 네트워크 강화였다. 그런데 주제가 자연스럽게 남북경협 쪽으로 흘러갔다. 그동안 대북사업과 관련해 한국 내에서는 쉬쉬하며 표면적으로 내세우기 꺼려했지만 이제는 조선족 기업가들이 나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남북과 중국 등 3국을 잇는 가교 역할에 적극 나서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말했다.
기업가뿐 아니라 중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조선족도 늘었다. 김봉규 한중식품 사장은 “중국 인민군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공무원이 된 조선족 동료가 많다. 그들은 월급으로 부동산 투자를 하는 등 돈을 굴려 부자가 됐다. 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승진해 고위급이 된 이도 상당수다. 한국이 아닌 중국에 남는 것을 선택한 조선족도 꽤 성공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대표 선거’에서 선출된 총 2287명 가운데 9명이 조선족이었다. 이들은 중국 내 조선족 183만 명을 대표한다. 또 지난해 8월 5일에는 중국 외교부가 북핵 문제를 담당하는 한반도사무특별대표 겸 6자회담 수석대표에 조선족 출신 외교관인 쿵쉬안유 외교부 부장조리를 임명했다. 그동안 6자회담 중국 측 수석대표는 중국인이었다. 동북 3성 가운데 하나인 헤이룽장성 출신인 쿵 신임 수석대표는 한국과 북한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