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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과 조지훈(사진), 김수영은 박목월과 함께 당시 한국 시단을 대표하던 중견 시인이었는데 1년 사이 차례로 이승을 떠났다. 청마는 1967년 2월 13일 59세, 지훈과 수영은 각각 1968년 5월 17일과 6월 16일 48세, 47세 나이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특히 지훈이 병마로 쓰러지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수영이 밤길 교통사고로 횡사했으니 그 충격과 비통은 예사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박목월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리고/어제 오늘은 차 값이 사십 원/십오 프로가 뛰었다’며 그들의 죽음 대신 커피 값 인상이라는 일상사를 무심하게 언급한다. 그들이 없어도 굴러가는 세상이 오히려 그들이 없는 세상의 슬픔을 증폭한다.
조지훈과 김수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50년이 됐고, 그 슬픔을 노래한 박목월의 ‘일상사’가 발표된 지도 50년이 됐다. 이제 그들이 세상에 머물렀던 세월보다 세상을 떠난 후 세월이 더 길어졌다. 그러나 조지훈과 김수영이 남긴 정신과 문학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소중하고 그리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조지훈과 김수영은 박학한 지성과 뛰어난 예술적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 올곧은 정신과 기개를 지녔던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동년배로 격동과 고난의 시대를 함께 겪으면서 그 시대를 고뇌하고 증언했다. 특히 이들의 강직한 시대정신은 후배 문인들에게 경외와 존숭의 대상이 됐다.
전통과 지조의 파수꾼, 조지훈
조지훈 시비. [위키피디아]
조지훈은 1920년 태어나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21세에 혜화전문학교를 마쳤다. 그 시대 지식인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했지만, 조지훈은 특히 약관의 나이에 이미 국학, 문학, 불교에 해박했다. 19세에 널리 알려진 시 ‘승무’로 등단했고, 20세 무렵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에 적극 참여했으며,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승무’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한국어로 표현한 명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승무’는 춤추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지만, 승무라는 춤사위보다 오히려 그것을 묘사하는 언어가 더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그 당시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의 미학이요, 문화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조지훈은 민족문화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아름다운 한국어로 한국의 미학을 탐구하는 시들을 발표했고,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편찬하면서 한글을 지켰으며, 민족의 민속과 역사를 탐구하는 숱한 연구를 남겼다. 그는 시인으로서 훌륭한 시를 많이 남겼을 뿐 아니라 ‘한국학연구’ ‘한국문화사서설’ ‘한국민족운동사’ 등 국학연구자로서도 선구적 업적을 상당히 이뤘다. 48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업적은 시, 산문, 논고, 저술, 번역 등 9권 분량에 달한다.
해방 후 조지훈은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이라는 유명한 3인 시집을 펴내며 한국 현대시단의 한 축으로 활동했다. 조지훈은 격동과 혼란과 폭력의 시대에 맞서 올곧은 정신을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권력과 시류와 이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불의와 변절을 엄하게 꾸짖는 글을 숱하게 발표했다. ‘자기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지조론’에서 강조하며 스스로 지조와 선비정신을 지켰다.
조지훈에게 민족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나 민족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나 민족의 현실에 관여하고 고뇌하는 것은 모두 같은 것으로, 전통적인 선비정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4·19혁명 때는 학생들 편에 서서 부패 권력에 항거했고, 추상 같은 격문으로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라는 유명한 구절은 4·18 고려대 학생 의거 기념탑에 새겨진 조지훈의 비문이다.
조지훈은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박목월은 그를 회고하면서 “산이 걸어가듯 하는 의젓함과 믿음직스러움”을 말하고 “깊은 도량과 선비다운 멋과 탁월한 식견”을 얘기하며 “참으로 그는 한갓 시인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비범한 사람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 국학 연구, 그리고 시대에 대한 충심과 고언보다 어쩌면 동시대 사람들에게 남긴 그의 대인적 풍모가 오늘날 우리에게 더 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자유와 정직의 모더니스트, 김수영
올해 새로 출간된 김수영 전집. [동아DB]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과 재회해 서울에 터전을 마련하자 김수영의 시적 재능과 정신적 에너지는 놀라우리만치 터져 나온다. 그는 비루하고 혼란스러우며 불의가 판치는 현실을 향해 부정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1959년 비로소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출간한다. 4·19혁명을 전후한 10여 년 동안 김수영은 가혹하고 철저하게 자신과 시대를 성찰한 시를 잇달아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의 새 지평을 연다.
김수영의 시는 파격적이고 거칠다. 전통적인 시적 어법을 버리고 보통 사람의 평범한 말투로 비속어와 욕설까지 섞어가며 시를 쓴다. 가령 조지훈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에서 보듯이 지극히 고운 언어로 노래한다면, 김수영은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며 거친 언어로 노래한다. 언어도 거칠지만, 순백의 눈에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고 하는 내용이 파격적이다.
‘눈’이란 제목의 이 시는 1957년 발표한 김수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시는 김수영 시의 어법도 잘 드러내지만, 지향점도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공격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다. 이 시에서 눈은 ‘죽음을 잃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해’ 살아 있고, 현실의 더러움을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감추고 있기 때문에 거짓과 위선의 존재가 된다. 그런 거짓과 위선을 젊은 시인은 가차 없이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이라면 눈처럼 깨끗해 보이는 대상이라도 과감하게 부정해야 한다. 그 부정과 비판의 방식조차 점잖은 꾸짖음이 아니라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는 거친 방식이다. 이러한 파격과 일탈의 언어, 관습과 권위의 거부, 부정과 비판의 정신이 김수영 시의 개성이요,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김수영 시의 정직성이다. 김수영의 시는 과도하게 실존적이고 당혹스러울 만큼 정직한 자기고백을 보여준다. 가령 1965년 발표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김수영은 자신의 옹졸함을 정직하게 성찰한다. 시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라는 직설적인 자기고백으로 시작한다. 이어 자기는 포로수용소에서도 간호원 일이나 도와주는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개와 아이에게도 큰소리 못 치는 소인배임을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고 자조한다.
김수영 시의 무서움은 비판의 강도에서도 나오지만 정직성과 더 관련 깊다. 김수영의 자해(自害)적 정직성은 독자의 위선적 방어를 쉽게 허문다. ‘죄와 벌’이란 시는, 길거리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때려 쓰러지게 한 사건이 소재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기고 싶을 이런 부끄러운 잘못조차 시의 소재로 삼을 뿐 아니라, 집에 돌아온 후 아는 사람이 혹시 봤을까 걱정하면서 거리에 버리고 온 우산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시인 김수영의 정직성은, 사람들과 세상의 거짓을 비판하고 깨우치게 하고자 자해도 서슴지 않는 수난자의 고행 같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김수영은 ‘자유와 정직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정직이 예사로운 정직이 아니라 무서운 정직이듯이, 그의 자유도 예사로운 자유가 아니다. 김수영에게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는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이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보듯이 김수영의 자유는 처절하고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자유를 위해 김수영은 시를 썼을 뿐 아니라 ‘지식인의 사회참여’ ‘시여, 침을 뱉어라’ 등의 글과 강연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사회 현실에 참여했다. 특히 ‘시여, 침을 뱉어라’는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시인들의 정신을 깨우는 구절로 유명하다.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은 김수영의 죽음에 대해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민족의 알갱이들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눈물의 시인 김현승은 “김수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렸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고 증언했다. 김수영은 자신의 치사함과 옹졸함을 노래했지만 결국 올곧고 위대한 정신을 보여준 시인이 됐다.
조지훈과 김수영이 죽은 지 50년이 된 오늘날, 그들이 남긴 문학과 생애는 더더욱 귀하고 그리운 것이 됐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궁핍하고 신산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높은 곳을 봤고 큰 것을 추구했으며 바른 것을 지켰다. 그에 비해 오늘 우리의 문학은 작게 바스라졌고 정신은 혼탁해졌으며 기개는 물질 속에 묻혔다. 조지훈이 말한 ‘자유의 활화산’과 김수영이 말한 ‘자유의 피냄새’ 속에 담긴 의미와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