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돈이지만 그동안 해놓은 게 아깝잖아요.”
자금 문제로 폐업을 고민 중이라는 한 스타트업 대표의 말이다. 스타트업 창업주가 폐업을 꺼리는 것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를 무기로 창업시장에 뛰어들어 지적재산권이나 관련 노하우를 쌓았어도 폐업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스타트업의 인수합병(M&A)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특히 대기업, 중견기업과 스타트업의 M&A가 늘어나면 스타트업의 투자금 회수가 쉬워져 창업 분위기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창업자도, 투자자도 답답한 스타트업 출구전략
기업가치 1조 원 이상으로 성장한 스타트업을 ‘유니콘’이라 부른다. 상상 속 동물인 유니콘처럼 크게 성공하는 스타트업이 드물어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 스타트업 시장에서는 대기업과 M&A에만 성공해도 유니콘이라 부를 만하다. 그만큼 M&A가 드물다.
최근 스타트업 전문매체 ‘플래텀’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스타트업 M&A는 총 8건. 이 중 대기업과 M&A를 한 스타트업은 지난해 7월 동원이 인수한 온라인 반찬가게 ‘더반찬’과 12월 SK플래닛이 인수한 신선식품 배송 스타트업 ‘헬로네이처’ 등 단 2곳에 불과하다.
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은 6월 22일 열린 ‘2017 스타트업 생태계 콘퍼런스’에서 “2015년 카카오가 626억 원에 대리운전 중개 서비스 ‘김기사’를 인수한 것 같은 대형 M&A 사례가 더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해외 기업의 한국 스타트업 인수 사례도 2014년 미국 모바일 광고업체 ‘탭조이’가 모바일 게임 분석 서비스 ‘파이브락스’를 인수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밝혔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한 해 M&A를 통해 투자금 회수에 성공한 스타트업은 전체의 2%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은 80% 넘는 스타트업이 M&A로 투자금을 회수한다. 알파고로 인공지능(AI)업계에 충격을 던진 딥마인드도 M&A를 통해 구글에 인수된 스타트업이었다. 페이스북과 함께 글로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장을 양분하는 인스타그램 역시 2012년 페이스북에 인수된 뒤 크게 성장한 업체다.
이처럼 국내 스타트업의 M&A 실적이 저조하다 보니 대다수 스타트업은 투자금 회수를 위해 주식시장 상장을 전제로 기업공개(IPO)를 택한다. 기업 매각이 어려워 지분 공매에 나서는 것. 현재 한국 스타트업의 90%가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한다. 2015년 한 해에만 스타트업 46개가 투자금 회수를 목적으로 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IPO는 창업자가 회사 경영권을 계속 갖고 있다는 점에서 M&A보다 좋은 선택지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일단 IPO를 하려면 상장이 가능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져야 하기 때문. 한국 벤처기업이 성장을 거쳐 주식시장에 진입하는 데 평균 12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성공한 스타트업만을 위한 투자금 회수 방안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상장으로 얻는 이득도 크지 않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조사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5년까지 5년간 주식시장에 상장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평균 500억 원가량이다. 해당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난감하다. 10년간 약 1억~200억 원씩 투자한 회사의 기업가치가 500억 원 남짓이라면 큰 이득을 보기 어렵기 때문. 게다가 M&A나 IPO 등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출구전략으로 투자금을 회수한 스타트업은 드물다. 맥킨지보고서에 따르면 창업 후 매각이나 IPO에 성공하는 비율은 한국이 평균 0.4%로 미국(61%)이나 이스라엘(60%)과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경향이 보수적으로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국내에서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에 투자해 자금을 회수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4.2년. 스타트업 종주국인 미국(6.8년)은 물론, 중국(3.9년)보다도 훨씬 오래 걸린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은 M&A 활성화보다 스타트업 투자나 육성에 관심을 더 보인다. 삼성전자는 ‘크리에이티브 스퀘어’를 통해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삼성 넥스트’라는 펀드를 조성해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롯데는 ‘롯데 액셀러레이터’를 설립해 스타트업 육성 및 지원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GS홈쇼핑, 아모레퍼시픽, 네이버, 카카오 등에서도 스타트업 육성 부서를 운영 중이다.
대기업은 왜 스타트업을 사지 않나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기업의 기업 환경 및 문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4월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새로운 시대, 혁신 스타트업이 답이다’를 주제로 개최한 ‘굿인터넷클럽’ 행사에서 “대기업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스타트업을 만나면 깜짝 놀란다. ‘경영진이 애들이더라’ ‘매출이 없다’ 등의 이유에서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먼 미래를 보고 하는 일인데, 하청업체처럼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고 기대하니 제대로 투자나 인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킴 알토스벤처스 대표는 “구글, 페이스북 등은 ‘이용자가 한 달에 28일 이상 쓰는 서비스라면 큰돈을 들여서라도 무조건 인수한다’ 같은 구체적인 M&A 기준을 갖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이처럼 명확한 인수 방향을 제시하면 투자자도 적극적으로 이 기준에 해당하는 스타트업을 연결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M&A를 하지 않아도 스타트업의 기술이나 노하우를 쉽게 빼올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5월 창조경제연구회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당시 미래창조과학부)에 제출한 ‘벤처·스타트업의 쉬운 M&A 여건 조성 및 글로벌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벤처와 대기업 간 M&A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불공정거래 문제를 꼽았다. 한국 기업의 관행상 기술보호 환경이 취약해 굳이 거액을 들여 스타트업을 인수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기술을 도용하거나 탈취할 수 있다는 것. 이와 같은 환경 탓에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어려워 자생적 창업 생태계 조성이 어려워졌다는 진단이다.
보고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업 간 비밀유지협약(NDA) 체결을 법으로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NDA는 다른 기업과 제휴, 협력, 납품 등을 협의하고자 기술, 아이디어, 경영 상태, 인력 상황 등 영업비밀을 공유할 때 이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유출하지 못하게 막는 계약이다. 대기업을 상대로 상대적 약자인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일일이 NDA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니 아예 법으로 NDA 체결을 강제화하는 편이 낫다는 것.
이 밖에도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핵심 기술인력을 빼가는 문제를 막기 위해 ‘기술인력 임치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방안도 있었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미리 등록한 핵심 기술인력을 대기업이 스카우트하지 못하게 막는 내용이다. 과거 이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무산됐다.
정부도 이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의원은 6월 27일 서울 강남 노보텔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44회 한국지식재산협회(KINPA) 지식재산최고책임자(CPO) 정책 세미나에서 ‘문재인 정부 창업벤처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스타트업 특허 살려야
김 의원은 이날 발표에서 “스타트업 특허가 사장되지 않도록 하려면 대기업과 M&A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이 어렵게 개발한 지적재산권을 지킬 수 있고 자생력을 갖춘 창업 생태계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스타트업이 보유한 특허 등 지적재산권은 이미 증가세에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국내외 스타트업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벤처기업 및 스타트업이 보유한 지적재산권(특허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상표권, 해외산업재산권) 수는 2010년 평균 6.7개에서 2014년 7.4개로 증가했다. 지적재산권의 증가를 이끈 것은 특허권이다.
같은 기간 특허권 수는 평균 2.9개에서 4.2개로 크게 늘었다. 투자금 회수에 성공하는 스타트업이 극소수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개발한 지적재산권이 대거 사장되고 있는 것.
이 때문에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 및 투자를 독려하는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가 활성화되도록 협회 차원에서 정부에 스타트업 제도 개선과 공제율 확대 등 인센티브 마련을 적극 건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기업도 할 말 있다스타트업 인수합병(M&A)에 인색하고 잘되는 스타트업의 기술을 모방한다는 지적을 받는 대기업도 할 말은 있다. 굳이 거액을 들여서까지 인수하고 싶은 스타트업이 없다는 것. 한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작은 스타트업이 좋은 서비스로 반향을 일으키면 대기업은 인수보다 이를 모방한 서비스를 내놓을 것을 먼저 생각한다. 기업이 모방을 포기하고 M&A를 선택하도록 스타트업이 매력적인 서비스로 시장을 선점하거나 따라잡기 힘든 기술을 갖추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현재 페이스북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히는 스냅챗도 창업 초 대기업의 모방을 뚫고 성장한 기업이다. 스냅챗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메시지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기능으로 유명하다. 2012년 스냅챗이 일부 지역에서 인기를 끌자 페이스북은 스냅챗과 거의 동일한 기능의 ‘포크’를 내놓는다. 하지만 스냅챗 이용자들을 끌어오지 못하자 ‘포크’를 접었다. 이후 2013년 페이스북은 스냅챗에 10억 달러에 인수를 제안하지만 스냅챗은 이를 거절하고 승승장구를 이어왔다. 현재 스냅챗의 기업가치는 약 200억 달러(약 23조 원)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