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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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면역력 증진… 발효 과학으로 검증된 ‘슈퍼 푸드’ 고추장

기억력 개선, 항산화 효과 국제 저명 학술지에 잇따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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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5-12-2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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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매운맛’의 비결인 고추장. 최근 한국 음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발효 과학의 결정체인 고추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GETTYIMAGES

    “K-매운맛’의 비결인 고추장. 최근 한국 음식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발효 과학의 결정체인 고추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GETTYIMAGES

    떡볶이, 비빔밥 등 K-푸드 인기가 고공 행진을 거듭하면서 ‘K-매운맛’이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고추장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최근 세계시장에서 고추장은 단순한 소스가 아니다. 기능성 발효식품으로 인정받는 추세다. 많은 연구자가 고추장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속속 발표하며 이런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관련 논문들에 따르면 고추장은 다이어트와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된다. 또 기억력 개선과 염증성 장질환 완화 효과도 있다. 고추장이 암세포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논문도 나왔다. 과학자들은 이런 놀라운 효능의 배경에 ‘고추장 속 미생물’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장과 뇌를 연결하는 미생물의 마법

    전북 순창군에 있는 재단법인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과 박선민 호서대 교수팀이 함께 진행한 최신 연구를 보자. 연구팀은 경련을 다스리는 약물 성분인 스코폴라민으로 쥐들의 기억력을 감퇴시켰다. 이후 그중 일부 쥐에게만 고추장을 먹였다. 그 결과 고추장을 먹은 쥐는 미로 찾기와 물체 인식 실험에서 뚜렷한 기억력 개선 효과를 보였다. 특히 캡사이신이 12㎎/㎏ 함유된 전통 고추장을 섭취했을 때 뇌의 해마 세포 사멸 억제와 뇌신경 영양 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BDNF) 증가 효과가 두드러졌다. 연구진은 이에 대해 “고추장 속 유익균이 만들어낸 ‘장내 미생물 생태계 변화’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고추장 섭취가 장내 유익균을 늘리고, 그것이 미주신경을 통해 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뇌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장-뇌 축(Gut-Brain Axis)’ 이론이 고추장에서도 증명된 셈이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해 ‘Kochujang enhances memory function via parasympathetic activation: Insights from network pharmacology and gut microbiota modulation(고추장의 부교감 신경 활성화를 통한 기억력 증진 효과: 네트워크 약리학 및 장내 미생물 조절을 통한 통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돼 화제를 모았다.



    고추장의 체중 조절 효과도 최근 관심이 집중되는 분야다. 고추장은 짭짤하다. 서양 과학자들은 한국인이 고추장처럼 염도가 낮지 않은 발효식품을 다량 섭취하는데도 서양인에 비해 비만이나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낮은 이유를 궁금해한다. 한아름 원광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연구팀은 그 해답을 ‘발효’에서 찾았다. 

    한 교수팀이 2022년 과체중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고추장을 12주간 섭취한 그룹의 내장지방과 허리둘레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그래프 참조). 특히 유익균 함량이 높은 전통 고추장을 섭취한 사람들의 혈중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뚜렷하게 개선됐다. 한 교수팀은 그 이유를 “고추장의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메주가 발효되면서 생성된 펩타이드, 이소플라본 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지방 축적을 억제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2022년 국제 저명 학술지 ‘뉴트리언츠(Nutrients)’에 게재됐다.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고지방 식단과 함께 고추장을 먹인 실험동물의 경우 지방간 및 간 염증 발생이 억제되고 비만으로 무너진 장내 미생물 균형이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소금만 먹인 그룹과 확연히 다른 결과로, 고추장 속 발효 성분이 나트륨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항염·면역의 최전선, 바실러스

    이처럼 고추장의 효능을 좌우하는 핵심은 미생물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전통 방식으로 만든 고추장에는 ‘바실러스 서브틸리스(Bacillus subtilis)’를 비롯한 다양한 바실러스가 살아 숨 쉰다.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은 2021년 전국 각지의 전통 고추장에서 분리해낸 바실러스를 분석했다. 그 결과 강력한 항산화 효과와 함께 혈전을 녹이는 혈전 용해 활성, 혈압을 낮추는 ACE(앤지오텐신 전환효소) 저해 활성 같은 효능이 확인됐다. 

    미생물의 힘은 면역력 증진으로도 이어진다. 8월 학술지 ‘국제분자과학저널(IJMS)’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면역억제제 성분인 사이클로포스파마이드로 면역을 억제한 쥐에게 고추장을 투여하자 면역세포인 NK세포(자연살해세포) 활성이 높아졌다. 면역 반응을 촉진하는 신호전달물질 사이토카인 분비도 증가했다. 

    2021년에는 고추장의 체내 염증 억제 효과가 확인된 바 있다. 그래 5월 발표된 ‘Protective Effect of Gochujang on Inflammation in a DSS-Induced Colitis Rat Model(DSS로 유발된 대장염 쥐 모델에서 고추장의 염증 보호 효과)’ 논문에 따르면 궤양성 대장염 환자와 유사한 증세를 보이도록 세팅한 실험쥐에게 고추장을 투여하자 손상됐던 장 점막과 상피 세포층이 회복됐다. 고추장이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우리 몸의 방어체계를 튼튼하게 하는 ‘면역 식품’임을 증명한 연구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전통 발효다. 상업화된 발효와 달리 전통 발효는 온도, 습도, 미생물 구성이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에서 이뤄진다. 최근 연구들은 기후변화가 발효 미생물 생태계와 장류 품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이 전국 장류를 대상으로 한 장기 모니터링 연구에서는 평균 기온 상승과 강수량 변화에 따라 장류 내 우점(優占) 미생물 비율이 달라지는 현상이 관찰됐다. 전통적으로 발효를 주도하던 바실러스 계열 균주 비율뿐 아니라, 일부 유산균 또한 발효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는 같은 레시피를 사용해도 기후에 따라 장맛과 기능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세계적으로 기후가 급속히 변화하는 만큼, 우리 발효식품을 연구하고 우점·특이 미생물을 분석해 분리 및 보존하는 것이 고추장을 비롯한 장류의 맛과 기능성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 될 전망이다. 

    전북 순창군에 있는 재단법인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 연구진이 한국 발효식품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순창군 제공

    전북 순창군에 있는 재단법인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 연구진이 한국 발효식품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순창군 제공

    전통의 지혜, 과학으로 날개 달다

    선조로부터 이어져온 한국 고유의 발효 기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각종 연구를 보면 전통 방식으로 메주를 띄워 만든 고추장이 미생물 다양성이 높고 기능성 물질 또한 풍부하다. 정도연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 원장은 “고추장은 콩, 고추, 쌀이 미생물과 만나 빚어내는 오케스트라와 같다”며 “최근 연구들은 전통 고추장이 비만, 당뇨, 뇌 건강, 면역력까지 아우르는 ‘종합 헬스케어 푸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K-푸드 열풍 속에서 고추장은 이제 ‘맛있는 소스’를 넘어 ‘건강한 발효 과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맵고 짠 자극적인 맛 뒤에 숨겨진 미생물의 신비, 그것이 바로 한국 전통 장류가 가진 진정한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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