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1

2004.07.01

유방은 포도송이’ … 예술과 외설 사이

솔로몬이 지은 노래 성경 편집 때부터 논란 … 사랑의 감정 빼어난 비유와 감각적 표현

  • 조성기/소설가

    입력2004-06-25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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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작품에서 성적인 표현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자고로 심심찮게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그 문제는 사회의 종교와 풍속, 윤리관, 개인적인 편차 등 여러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누구도 쉽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성적인 표현이 사회풍속을 문란케 할 위험성이 있으면 외설로 판정을 내린다고 하지만 그러한 기준도 주관적인 해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간행물윤리위원회나 신문윤리위원회 같은 데서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놓기도 하였다. 가령 ‘신문에 연재를 할 때 남녀의 성기에 관한 묘사를 직접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외설적 표현에 속한다’는 기준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런 기준도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비유적인 표현인 경우에는 어떻게 판정을 내려야 하는지 당국자나 작가나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요즈음 서양 영화에서 남녀의 성기와 음모(陰毛)의 노출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쩌면 노출이 그 부분을 살짝 가린 화면보다 차라리 덜 자극적일 수 있다. 한국에서 그런 영화가 개봉될 때 모자이크로 처리하는 것은 사람을 감질나게 하고 더 자극받게 한다. 하루빨리 한국에서도 그런 미봉책으로 영화를 훼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에로틱한 사랑’ 노래 지지한 사람들 배척과 핍박받아

    남녀의 몸은 음란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음란한 것이고, 예술품을 대하듯 바라보면 그보다 아름다운 실체도 따로 없다. 신의 위대한 창작 예술품이 인간의 육체가 아닌가. 자기 육체의 각 부분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육체의 각 부분들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여러 가지 규제로 눈을 가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책이다. 그런데 거룩한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에서도 외설 시비가 일어난 책이 있다. 바로 ‘아가서’이다. 원래 제목은 히브리어로 ‘쉬르 하쉬림’, 즉 ‘노래 중의 노래’이다. 첫머리에 ‘솔로몬의 아가라’ 하여 저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솔로몬이 지었다는 1005곡의 노래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을 모은 것이 아가서인 셈이다. 남녀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빼어난 비유로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을 이룬다. 스탕달의 ‘연애론’에서 언급되었듯이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소위 결정(結晶)작용이 일어난다. 결정작용이라는 말은 독일 잘츠부르크 소금 광산 갱도에 나뭇가지를 두세 달 넣어두면 하얀 소금 결정이 맺어지는 현상에서 따온 말이다. 우리식으로 쉽게 말하면 눈에 콩깍지가 껴 상대방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보이기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상대방 육체의 각 부분들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게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표현이 외설에 가까울 정도로 육감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이 시기야말로 영감으로 가득 차서 위대한 시와 문학작품이 태어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아가서도 외설적 표현 때문에 성경을 편집할 당시 과연 정경성(canonicity)을 획득할 수 있는 책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아가서가 정경에 포함된 후에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고지식한 신학자들도 제법 있었다. 아가서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대략 네 가지 학설이 있다.

    유방은 포도송이’ … 예술과 외설 사이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와 같은 '아가서'의 생생한 묘사는 이 성경을 '외설 시비'에 휘말리게 했다.



    첫째는 남녀의 에로틱한 사랑을 노래한 책이라는 ‘자연적 해석’이다. 이 해석법을 지지한 사람들은 성경을 모독했다 하여 교회에서 배척과 핍박을 받아왔다. 데오도르는 죽고 나서도 서기 553년 콘스탄티노플 제4차 회의에서 정죄를 받기도 하고, 카스텔리오는 1545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기도 한다. 둘째는 신과 인간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알레고리 해석’이다. 이것이 아가서에 대한 정통 해석법인 셈인데, 18세기 이후에는 유대교와 가톨릭을 제외하고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셋째는 고대 근동 신들의 결혼과 왕의 결혼에 관한 노래라는 ‘신화적 내지는 제의적 해석’이다. 남녀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신성한 제의와도 같으므로 신화적이고 제의적인 용어들이 일반인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용어로 차용되는 일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넷째는 다윗의 몸난로 노릇을 했던 수넴 여자가 다윗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아들인 솔로몬의 구애를 거절하는 내용이라는 ‘역사적 해석’이다. 에로티시즘 이론에 의하면 에로티시즘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거절이 개입되어야 하는데, 수넴 여자가 거절하면 할수록 솔로몬은 더욱 애가 타서 연정이 불타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가서를 보면 두 남녀가 실제로 교합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므로 수넴 여자가 솔로몬의 구애를 거절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그중에서도 성적 교합을 가장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은 아가서 7:10-13 부분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동네에서 유숙하고 일찍이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보자고 했는데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하는 것은 성적 교합을 암시하는 말임이 틀림없다. 또한 합환채는 남녀의 성적 교합을 도와주는 식물이므로 합환채가 향기를 토했다는 것은 성적 교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의 신부는 덮은 우물’ 은밀한 부분 절묘하게 묘사

    그리고 7:2에서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라고 노래하는 것으로 보아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이미 보고 감촉까지 느꼈음이 분명하다. 배꼽춤을 추는 여인인 경우에는 성적 교합과 관계없이 배꼽을 구경할 수도 있겠지만, 포도주를 따라 마실 수 있는 둥글고 작은 잔으로 배꼽을 비유한 것은 누워 있는 여인의 배꼽, 다시 말해 작은 잔처럼 반듯이 놓여 있는 배꼽을 보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인의 배꼽을 술잔으로 삼아 포도주를 가득 부어 마시고 싶다는 표현만큼 에로틱한 묘사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표현을 어떻게 신과 인간의 사랑을 비유했다고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집요하게 반복되는 유방에 관한 묘사도 무척 감각적이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7:3) ‘네 유방은 그(종려나무) 열매 송이 같구나.’(7:7)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7:8) 유방에서 사슴의 쌍태 새끼나 종려나무의 열매, 포도송이를 연상하는 것은 유방의 풍요한 생산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방에 관한 묘사 다음에 나오는 구절 역시 성적 교합을 강하게 암시한다.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상대방의 콧김을 사과 냄새로 여기려면 몸이 밀착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물론 입맞춤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콧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잠자리에서 더욱 친밀하게 상대방의 콧김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아가서에서는 입맞춤도 보통 입맞춤이 아니라 진한 입맞춤을 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4:11) 혀뿌리까지 닿는 달콤한 입맞춤을 해보지 않고는 이런 표현이 나올 리 없다. 무엇보다 여성의 은밀한 부분에 관한 표현이 일품이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4:12) 덮은 우물의 뚜껑을 서서히 들어올리고 봉한 샘을 여는 남자는 얼마나 설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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