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2005.01.11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조선시대 ‘낙생역’으로 불리던 역마을 … 마을 포함 ‘싹쓸이식’ 도시 건설 안타까운 마음

  • 도도로키 히로시/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hstod@hanmail.net

    입력2005-01-05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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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경기 용인시 구성초등학교 동편의 느티나무 숲 안에 있는 비석들과 미륵각.

    팔월 초나흩날 무자(戊子).

    맑음. 용인에 닿았다.

    양재를 출발하면 한강변의 평지는 끝나고 좁은 골짜기가 시작된다. 서울 서초구 신원동에 이르자 오른편으로 청계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휴일에는 인파가 우르르 모여드는 산이지만, 평일은 지극히 조용하다. 길을 걷다 마음이 바뀌면 청계산 정상의 망경대에까지 등산을 시도해볼 만하다.

    청계산을 지나면 이제 다리내고개다. 교통방송을 듣다 “다리내고개 주변이 정체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 판교 사이의 다리내고개는 통신사 사행로를 걸으며 처음 만나는 고개다운 고개다. ‘대동지지’를 보면 ‘月川峴(월천현)… 又云(우운) 達于乃峴(달우내현)’이라는 구절이 있다. ‘월천현’을 풀어보면 ‘달+냇가+고개’이니 이것은 뜻을 딴 한자이고, ‘달우내현’은 어감상 분명 소리를 딴 한자일 것이다. 결국 한자는 전혀 다르지만 이 둘은 같은 뜻, ‘다리내고개’를 표현하는 말인 것이다.

    높이 135m의 다리내고갯길은 일제시대에 이르러 다른 길로 철도와 신작로가 나면서 ‘버려진 고개’가 되었다. 이것을 다시 역사의 무대 위로 끌어올린 것은 경부고속도로다. 옛길과 고속도로는 중간에 있는 도시에 구애받지 않고 되도록 직선 길을 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이 두 길은 국도나 기찻길에 비해 비슷한 경로를 택할 확률이 월등히 높다. 경부고속도로 역시 다리내고갯길 바로 옆으로 뻗어 있다. 옛길은 지금도 좁은 흙길로 남아 있어서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놓치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다리내고갯길 ‘버려진 고개’

    낮에 판교에서 쉬는데 광주부윤 윤동승, 부평부사 안상즙, 김포군수 민백인이 보러 왔다.

    판교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제는 100명에게 물으면 하나같이 ‘판교 신도시’라고 답하지 않을까. 제2의 분당이라고 불리는 곳, 정부가 생태형 자족형의 신도시를 건설한다며 2005년부터 아파트 분양을 시작하는 곳 말이다. 그런데 필자가 걸으며 도착한 판교는 ‘쑥대밭’ 그 자체였다.

    흙먼지가 끊임없이 흩날리는 땅. 철거촌처럼 벽에 빨갛고 커다란 ‘X표’를 달고 헐릴 차례만 기다리고 있는 마을 농가들. 제대로 된 이주 보상을 요구하는 구호가 어수선한 글씨로 쓰인 빨간 현수막들. 앞으로 ‘마지막 농성장’이 될 듯한 컨테이너 한 개.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일본 도쿄 근교 목장지대에 신공항(현 나리타공항) 건설 강행을 실력 저지하던 농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판교는 공항 부지도 아닌 그저 신도시 예정지다. 그러면 원래 있던 마을은 남겨두고 주변의 농지만 개발하면 되지 않을까. 필자는 한국의 이런 ‘싹쓸이식’ 도시 개발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청계산 입구의 노거수와 미륵당.

    헐리는 마을 중간에 공사용 칸막이 사이로 사면초가가 된 채 버티고 있는 순두붓집이 보였다. 주차장에 있는 차는 온통 경찰 차와 택시다. 있는 집이라고는 부동산 가게뿐인 이 동네에서 경찰관과 택시 기사가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조엄이 판교에서 중화(점심식사)를 한 만큼 필자도 이 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주인은 ‘15년의 전통’이라고 쓰여 있는 차림표를 내왔다. 조금 오래돼 보이는 글씨를 보니, 이 집의 역사는 15년도 훨씬 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판교는커녕 분당이라는 신도시도 없던 시절부터 영업해온 이 순두붓집도 머지않아 문을 닫아야 하나? 계산대를 지키고 서 있던 여주인은 “헐릴 때까지는 할 것”이라고 했다. “철거 기한이 언제인가요?”라고 물었더니 “10월 말이에요”라고 한다. 필자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가 이미 12월 초였다. 주인은 “오늘이 우리 집 17년 생일”이라며 떡을 돌렸고, ‘춘풍령’이라는 상호가 적힌 2005년도 달력도 하나 건넸다. 이런 아름다운 정취를 불도저로 밀어내고 획일적인 상자형 건물을 짓는 것이 과연 ‘삶의 질 향상’인지, 밥을 먹는 내내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구성초교 자리가 용인 객사

    지금의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은 조선시대 ‘낙생역’이라고 불리는 역마을이었으며, ‘판교점’이라는 주막거리였다. 일제시대에는 이 일대가 낙생면사무소 소재지로 번창하기도 했다. 어쩌면 ‘춘풍령’은 그 시절 주막촌의 정다움을 전해주는 마지막 가게인지도 모른다.

    판교에서부터 길은 다시 고속도로와 나란히 이어지고 도로 너머로 분당 신도시가 보인다. 분당 어디를 봐도 예전에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버렸다. 분당을 지나면 이제 용인이다.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신도시 개발을 위해 헐려나가고 있는 판교 전경

    경기 용인시는 조선시대의 용인현과 양지현이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합쳐지면서 생겨났다. 사실 옛 용인도 조선 태종 13년에 이 일대의 용구현과 처인현이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용인현의 읍치(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는 관아가 있던 곳)는 현재의 시청 소재지가 아니라 구성읍 소재지에 있었고, 지금 구성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에 관아(군청)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도 학교 동편에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과 군수들의 선정비가 두 줄로 세워져 있어 이곳이 과거의 관아였음을 알려준다. 비석 맨 끝에 있는 전각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고 부르는 석상도 안치돼 있다. 이것은 원래 고을의 수구(水口, 물이 빠져나가는 곳)를 막기 위해 비보숲(裨補, 마을을 보호하는 숲)과 함께 세운 축귀장신(逐鬼將臣)이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미륵님’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외에 이 마을에 남은 옛 용인읍의 흔적은 다음날 갈 향교밖에 없다. 나머지는 온통 아파트 숲이다. 소규모로 개발된 아파트들은 평지보다 언덕에 생기는 경우가 더 많아 시야를 온통 가로막고, 갑갑하게 만든다. 판교와 같은 ‘싹쓸이식’ 개발도 문제지만, 용인처럼 이렇게 소규모 난개발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는 ‘집어먹기식’ 개발도 보기 흉한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원래의 풍경을 최대한 보존하며 차근차근 계획적으로 개발하는 것일 텐데…. 평일 낮인데도 왕복 2차로의 양옆을 주차장처럼 가득 메운 승용차들을 보면서 용인이 계획 없는 개발의 대가를 똑똑히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주막거리 판교 ‘개발 신음’
    조엄은 이곳 용인읍에서 마을 지주 이구의 안내에 따라 잠을 잤는데, 아마도 지금의 구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에서 밤새 놀았을 것이다.

    밤에 아우 인서 및 아들 사위와 이야기하다가 성문 열릴 때가 되었다. 인하여 칠언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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