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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⑥

근대화 모델 제시한 사상계 그룹

민족주의 바탕 위에 서구식 민주화·산업화 모델 접목…새 세대 육성 내걸어

근대화 모델 제시한 사상계 그룹

근대화 모델 제시한 사상계 그룹

1960년 4·19혁명을 전후로 ‘사상계’는 전성시대를 맞는다.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는 4·19혁명 당시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들. 1960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민주혁명의 기록’에 수록된 사진이다.

‘사상’이 종간되고 이듬해인 1953년 4월, 곡절 끝에 민간 잡지 ‘사상계’가 창간됐다. ‘사상’ 발간 시기에 서영훈의 기여가 컸다면 ‘사상계’ 창간 초기인 1953~54년에는 강봉식(후일 고려대 영문과 교수)과 전택부(후일 서울YMCA 총무)가 장준하를 도와 편집에 참여했다. 특히 전택부는 55년 ‘사상계’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많은 일을 했다.

‘사상계’ 창간 초기에는 필자들이 장준하와의 면식 관계에 의해 섭외된 듯하다. 해방 전인 1942년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곳 2년 과정 예과에 전택부, 문익환, 문동환, 전경연, 박봉랑 등이 다니고 있었다. 전택부가 초기 ‘사상계’에서 장준하를 돕게 된 것은 이 인연에서 비롯됐다.

백낙준의 도움도 계속됐다. 연세대 동방학연구소(현 국학연구원)의 ‘동방학지’가 처음 발행된 곳도 사상계사였다. 연세대 측 배려라 할 수 있었는데, 백낙준 총장은 장준하와 ‘사상계’를 물심으로 시종 지원했다. ‘사상계’ 초기 백낙준의 영향은, 1955년 김준엽이 사상계 그룹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필자의 90% 이상이 연세대 교수였다는 점에서도 뚜렷이 감지된다.

1955년 3월 고려대 교수인 김준엽의 가세로 필자들이 고려대와 서울대 교수들로 확대됐다. 55년 2월 대만대학에서 4년간 연구를 마치고 고려대에 복직한 김준엽은 곧바로 ‘사상계’에 참여했다. 김성한에 의하면, 김준엽의 귀국은 ‘사상계’ 분위기를 크게 진작해 발전의 전기가 됐다고 한다. 김준엽은 편집위원회에서 사회과학 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사상계’ 편집위원을 지냈던 정명환은 “1960년을 전후한 10년간은 ‘사상계’가 문자 그대로 우리나라 사상계를 지배하던 시대였다”고 한 바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다. 1955~65년은 ‘사상계’의 전성기이면서 이 잡지가 한국 공론장의 중심에 있던 시기였다.



평안도 출신 편집위원들, 지역 편중의 한계

1955년은 사상계 그룹이 본격 형성되던 첫해였고 동시에 잡지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는 시기였다. 그러나 문제점도 있었다. ‘사상계’ 5대 주간인 지명관은 재임 시절 가장 고민스러웠던 문제로 편집위원의 지역적 편중을 들었다. “이북 사람들이 하는 잡지가 아니냐 하는 말을 듣는” 문제였다. 장준하도 새로 편집위원을 선정할 때마다 이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지명관은 1964년 사상계 그룹에 들어왔으나 이미 ‘사상계’가 말기에 접어들었을 때다. 그룹 초반 형성기와 중반 전성기를 지나 말기에 들어섰을 때조차 지역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64년 10월부터 시작해 ‘사상계’ 발행인이 부완혁으로 넘어가기 직전인 67년까지,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사상계’ 주간을 맡았던 지명관 본인도 평안도 정주 출신이었다.

초대 주간 김성한(이하 재임 1955.1 ~58.4), 2대 주간 안병욱(1958.5~59.9), 3대 주간 김준엽(1959.1~61.1), 4대 주간 양호민(1961.2~64.9), 5대 주간 지명관(1964.10~67년 말)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사상계’에서 주간을 했던 다섯 명 모두 이북 출신이었고, 김성한을 제외하곤 모두 평안도 출신이었다. 주간뿐 아니라 편집위원으로 사상계 그룹을 형성한 이들 상당수가 서북 출신 지식인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어쨌든 1955년은 ‘사상계’가 완전히 자리 잡고 도약을 시작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정식 주간과 편집위원회 체제를 도입해 1월 소설가 김성한이 초대 주간으로 취임하고 엄요섭, 홍이섭, 정병욱, 정태섭, 신상초, 강봉식, 안병욱, 전택부로 초대 편집위원회를 구성했다. 특히 이 해를 기점으로 사상계 그룹이 중요하게 삼은 목표는 ‘새 세대 육성’이었다. 편집위원회는 이런 지향을 명확히 공표하기 위해 ‘사상계 헌장(憲章)’을 만들어 8월호부터 권두에 실었다. 주간 김성한이 작성하고 장준하 명의로 발표한 이 헌장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자유와 민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매진하고자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민족의 현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주체가 “청년, 학생, 새로운 세대”임을 명확히 선언했다. 또한 이 해에는 사실상 한국 최초 문학상이라 할 수 있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논문상과 번역상 제도도 만들었다. 3000~4000부에 머물던 발행부수가 처음으로 1만 부를 돌파한 것도 이 해였다.

초대 편집위원회는 ‘사상계’의 편집 방향을 다음 5가지로 확정했다. ‘민족의 통일’ ‘민주사상’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이다. ‘민족의 통일’과 ‘민족적 자존심’은 분단 극복과 식민 잔재 청산의 과제를 가리킨다. 나머지 세 항목, 이것은 ‘사상계’의 지향이 한국 사회의 총체적 근대화에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근대화에 해당하는 것이 민주화라면 경제적 근대화는 경제발전(산업화)으로, 문화적 근대화는 새 문화 창조로 구체화됐다. 근대화 개념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설정했던 것이다.

근대화 모델 제시한 사상계 그룹

함남 풍산 출신인 김성한은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 후 ‘사상계’ 초대 주간으로 ‘사상계 헌장’을 작성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평남 용강 출신인 안병욱은 ‘사상계’ 2대 주간을 거쳐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평북 강계 출신인 김준엽은 고려대 교수로 있던 1955년 ‘사상계’에 합류해 3대 주간을 지냈다. 평양 출신인 양호민은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사상계’ 4대 주간을 맡았다. 평북 정주 출신인 지명관은 ‘사상계’ 5대 주간을 지냈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교수 생활을 하다 귀국해 한일 문화교류에 기여했다(왼쪽부터).

근대화의 내용과 지향점

‘사상계’의 전성기던 4·19혁명 전후에 주간을 맡았던 김준엽은 ‘사상계’ 발간을 중국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잡지 ‘신청년(新靑年)’과 비교하면서 “잡지를 위한 게 아니라 근대화 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준엽의 생각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사상계 그룹이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초반까지 표방했던 지향은 명확히 ‘국가와 민족의 근대화’였다.

이 ‘근대화’ 개념은 민주화를 당연히 포함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권력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빌미로 ‘반공’을 사용한 예는 무척이나 빈번했다. 그런데 사상계 그룹에게 근대화는 반공과 ‘논리적으로’ 함께 가는 개념이었다.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사회를 민주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민주화는 곧 정치적 근대화이며,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이룩해야만 공산주의의 침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었다. 실제로 1950년대 이승만 정권기에 사상계 그룹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중반 무렵 ‘사상계’의 박정희 정권 비판도 같은 논리의 맥락에 있었다. 이 시기 주간을 했던 지명관은 최근 2012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적인 발전은 안 하려고 하니까, 거기에 대한 비판이지. ‘근대화의 바른 길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저건 저러다가 파탄되는 정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죠. ‘근대화 노선은 같지만, 박정희 정권이 가는 길이 바른 근대화를 하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해서 이제 저항을 하죠.”(국사편찬위원회의 ‘지명관 녹취록 3차’)

민주화는 확실히 근대화 차원에서 이해됐던 것이다. 1950년대 사상계 지식인 집단의 이념을 지성사 계보에서 일제강점기 안창호 등의 우파 민족주의, 문화주의의 ‘연장’으로 파악한다면, 이 계보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그런데 평가에서 당연히 고려돼야 할 점이, 1950년대가 1920~30년대와는 다른 역사적 조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안창호와 이광수의 시대에는 근대화라는 반봉건의 과제와 민족독립이라는 반제 운동의 과제 그 둘을 동시에 충족하는 원리가 필요했다.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일제강점기 반제·반봉건이라는 이중의 요청에 답할 수 있는 원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모순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해방이 되고 국가 건설이 본격화된 1950년대는 상황이 달랐다. 해방으로 말미암아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과제가 소멸하고 분단으로 말미암아 좌익과의 투쟁이라는 현실적 과제도 소멸한 50년대 후반에, 우파 민족주의 영향 하에 놓여 있던 지식인들이 최대 과제로 삼았던 민족의 ‘근대화’는 적어도 남한 상황에서는 적실한 목표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1950년대라는 시기는 교육기관의 증가로 지식층이 급격히 확대하고 있던 때였다. 안창호, 이광수 등 계몽주의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던 1920년대에는, 지난 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할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조선인’의 수효가 객관적으로 봐서 많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근대화’라는 새로운 윤리를 담당할 사회계층 또는 지식인층이 사실상 결여돼 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일제강점기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은 분단 후 50년대에 와서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사상계 그룹이 목표하는 근대화한 국가상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은 모델이 곧 서구사회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서구를 모델로 해 근대화로 달려가겠다는 사상계 지식인 집단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지식인들의 성향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얼핏 상충돼 보이는 두 요소, 즉 서구 지성에 대한 매혹과 민족주의 성향이 이들에게는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적어도, 서구사회에 대한 열망과 민족주의가 하등 모순되지 않았다. 이들 생각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민족을 위해 과거를 버리고 서구를 향해 나아간다.’

근대화 모델 제시한 사상계 그룹

1965년 ‘사상계’ 9월호에 들어갈 예정이던 한일협정 반대 팸플릿(조국수호국민협의회 발행)을 경찰들이 압수하고 있다(왼쪽).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평화행진을 하던 고려대생들이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한 것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은 4월 18일 서울 동대문(흥인지문) 앞에서 시위를 하는 고려대생들.

미국의 지원과 유도

사상계 지식인들은 국가이념 모델로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설정하고 있었다. 이는 사상계 그룹이 사실상 미국적 자유주의에 경사돼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쪽에서도 이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시각에서 당시 한국 사회에서 ‘사상계’가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1962년 주한 미공보원(USIS·미문화원)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사상계 지식인들이 당시 ‘오피니언 리더’에 해당하는 대학교수들 집단이었다는 의미에 더해 한국의 대학교수 집단 자체가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한국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정일준의 ‘한국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실제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은 ‘사상계’ 편집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후 사회를 세계적 차원에서 재편하고 있던 미국이 사상계 그룹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은 어느 면에서 당연했다.

정일준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 이후 60년대에 걸쳐 “주한 미공보원(미문화원)은 한국 지식인들에게 근대화론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 서적의 번역과 학자 간 교류는 대표적 활동들이었다. 미공보원은 사상계사에 교양문고 발간을 위한 용지도 공급했다. 심지어 미공보원은 사상계사가 번역해서 낼 도서를 추천하기도 했는데, 60년대 한국 지식사회와 정치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로스토(미 행정부 정책고문)의 근대화론도 이렇게 번역됐다. 사상계사의 마지막 주간을 지낸 지명관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2012년,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USIS 사람이 왔어요.”



주간동아 2015.09.14 1005호 (p62~65)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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