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0

2014.06.02

제정신이야, OS를 사랑한다니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4-06-02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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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신이야, OS를 사랑한다니
    미학자 진중권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이미지 인문학1’에서 가상과 실재가 중첩된 디지털 이미지의 시대, 새로운 인간학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가상과 실재의 분리를 근본으로 했던 전통 철학의 전제는 이제 종언을 고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상상과 이성, 허구와 사실,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을 봉합선 없이 이어준다”는 것이 진 교수의 말이다.

    그의 책은 보르헤스의 단편 ‘원형의 폐허’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밤마다 꿈을 꾸어 아이의 형상을 빚는 어느 늙은 사제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환영은 꿈으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육체 속에서 비트 단위 정보로 구성된다. 인간은 스스로 지은 이 환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감각을 나눌 수 있을까.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는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이라는 테마로 만들어낸 멜로영화다. 새로운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가상과 실재의 경계 혹은 진 교수의 말대로 가상과 실재가 중첩된 세상에서 이루어진, 전에 없던 러브스토리라 할 만하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여인(OS)은 육체를 보여주지 않으나 관능적이고, 차가운 디지털 신호와 이미지로 구현된 세상은 인간의 온기를 자아낸다. ‘그녀’는 연결될수록 고독하고, 갈망할수록 달아나는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관계와 사랑, 자아의 본질을 특별한 스토리로 보여준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사람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대신 편지를 써주는 일을 하는, 기업 ‘아름다운 손편지닷컴’의 직원이다. 그는 의뢰인의 진심을 아름답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 솜씨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산다. 그러던 중 그의 컴퓨터에 설치한 새로운 개인 맞춤형 인공지능 운영체제가 인간의 육성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가 운영체제의 성별을 ‘여성’으로 지정하자, 자신의 이름을 서맨사(목소리 스칼릿 조핸슨 분)라고 소개하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운영체제가 심상치 않다. 컴퓨터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테오도르의 일상과 희로애락을 공유한다. 자꾸 다른 이들로부터 튕겨져 나오기만 하던, 관계 맺기를 힘들어하던 테오도르에게 서맨사의 목소리는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 그는 서맨사와 사랑에 빠진다. 서맨사는 테오도르에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갖고 싶다는 갈망을 표현한다. 당신을 만지고 싶고, 당신에게 안기고 싶다고 말한다. 이 사랑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

    제정신이야, OS를 사랑한다니
    영화 속에서 서맨사는 스스로를 “나는 수많은 프로그램 개발자의 성향이 조합된 운영체제이지만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화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몸을 갖진 않았지만, 온전한 인격체인 것이다.

    디지털이 열어놓은 삶과 공간, 가능성이 무한해질수록 정작 스스로는 폐쇄회로 속에 갇히고, 자신을 대리하는 디지털 분신(아바타)이 많아질수록 자아를 잃어가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표현되는 디지털 그물망이 촘촘해질수록 진실한 관계는 점점 불가능해지는 현대인의 역설을 이 영화는 한없는 자기 연민으로 담아냈다.

    호아킨 피닉스가 형형한 눈빛으로 보여주는 진한 외로움, 스칼릿 조핸슨이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표현한 애틋함과 관능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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