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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의 작은 사치

신문지에 둘둘 꽃다발과 함께 봄이 옵니다

꽃병의 존재 이유

  •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신문지에 둘둘 꽃다발과 함께 봄이 옵니다

신문지에 둘둘 꽃다발과 함께 봄이 옵니다

꽃은 적은 비용으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다. 농협부산화훼공판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꽃들.

집 안을 둘러보니 꽃병이 다섯 개쯤 있다. 꽃병으로 삼을 수 있는 녀석들까지 꺼내면 훨씬 더 많겠지만 애초 꽃병으로 태어난 녀석들, 그들에게 한동안 꽃을 꽂아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생화와 감쪽같이 비슷한 가짜 꽃을 더 오래 품고 있거나, 먼지만 머금은 채 자리를 지키거나, 아예 서랍 속에 들어가 빛도 못 보고 있었다. 이 중 두 녀석을 먼저 봄맞이로 구제해주기로 했다.

간만에 집 근처 서울 서소문 꽃도매시장에 들렀다. 그녀가 좋아하는 작약과 봄맞이에 제격인 프리지어를 한 다발씩 사기 위해서였다. 꽃시장 중간쯤에 있는 가게에 들르자 꽃 파는 할머니가 작약 대신 나나글라스라는 꽃을 권했다. 작약과 비슷하게 생긴 데다 제철이란다. 그래, 꽃도 제철이 있는 거다. 여러 색깔 나나글라스 가운데 아주 옅은 초록빛이 감도는 녀석을 골랐다. 샛노란 프리지아와 잘 어울릴 듯했고, 작약의 우아함에도 견줄 만해서다.

할머니가 나나글라스라고 부른 꽃의 진짜 이름은 라눙쿨루스다. 근데 라눙쿨루스보다 나나글라스가 훨씬 더 정겹고 예쁜 이름 같다. 뽀얗게 화장하고 빨간색 립스틱까지 바른, 칠순 넘은 꽃집 할머니가 불러준 이름이다.

자신을 위한 선물로도 최고

서울에는 고속버스터미널과 양재, 그리고 서소문에 꽃도매시장이 있다. 꽃도매시장은 대개 새벽에 문을 열어 오후까지 영업한다. 해뜨기 전 잠깐 다녀오는 게 좋다. 여기선 다발 단위로 꽃을 살 수 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대개 꽃집에서 파는 꽃다발은 리본을 잘 묶어 주는 대신 최소 몇만 원씩 한다. 좀 비싼, 잘나가는 꽃집에 가면 10만 원을 호가하는 꽃다발도 많다. 하지만 꽃도매시장에선 웬만한 꽃 한 다발이 몇천 원대다. 좀 비싸다 싶어도 1만 원짜리 한두 장이면 가능하다.



사진 속에 보이는 꽃병 속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이 9000원, 라눙쿨루스 한 다발은 7000원이었다. 이른 시간인 데다 흥정 없이 준 값이라 그렇지, 만약 좀 더 많이 사거나 깎아달라고 졸랐다면, 혹은 파장 무렵인 오후에 갔다면 더 싼값에 살 수도 있었을 거다.

값이 싼 대신 투명 비닐과 리본 포장을 기대해선 안 된다. 신문지에 둘둘 말아준다. 근데 이게 의외로 보기 괜찮다. 상대에게 투박하게 바로 건네도 나쁘지 않지만, 꽃병에 담아두면 금상첨화다. 여기서 사는 꽃은 꽃병에 담기는 순간이 비로소 선물이 되는 때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을 위한 선물에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봄이 오는 느낌을 이보다 잘 전해줄 선물이 또 있으랴. 진한 향기가 그윽해지는 것도 좋고, 화사함으로 눈을 호사하기에도 좋다.

꽃은 물만 잘 갈아주면 일주일까지 간다. 집 안에 꽃향기 풍기며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효과치곤 무척 싼값 아닐까. 이런 게 작은 사치다. 집 안 가득 꽃으로 장식하지 않아도, 비싼 플로어리스트에게 맡기지 않아도 꽃을 꽃병에 잘 담아두는 것만으로 우리는 꽤나 행복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전통적이면서도 오래된 로맨틱한 행동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꽃을 받은 여자가 속으로 ‘남 눈에도 잘 띄고, 귀찮게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가지’ 혹은 ‘이거 며칠 지나면 바로 쓰레기가 되는데 버릴 때만 귀찮지’라거나 ‘최소 몇만 원은 되는데, 그냥 돈으로 주는 게 낫지’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꽃이 전부야? 꽃은 조연이고 다른 그럴싸한 선물이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끔찍할지도 모른다. 이런 끔찍한 일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현실이다.

돈이 있어야 로맨틱해질 수 있다고 여기는 요즘 사람의 생각을 탓할 건 아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만든 거니까. 사실 꽃은 더는 그리 매력적인 선물이 아니다. 꽃보단 프라다 지갑이 더 파괴력 있는 선물이고, 블루박스에 담긴 티파니 주얼리가 사랑을 전하는 데 더 효과적인 선물인지도 모른다.

투자 대비 몇백 배 만족

신문지에 둘둘 꽃다발과 함께 봄이 옵니다

필자 집에 봄 향기를 물씬 전해준 프리지어(위)와 라눙쿨루스.

이건 여성의 마음이 변해서 그런 게 아니다. 남성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물질만능주의를 만들고 외모지상주의를 만든 게 어디 여성만의 책임이랴. 훨씬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이 주도한 일 아닌가.

꽃은 그리 실용적이지 못한 선물이다. 사실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실용성이나 이성을 따질 게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꽃다발 선물을 받고 진심으로 기쁘게 웃는 이가 줄어드는 건 안타깝다. 심지어 중국에선 돈을 꽃처럼 접어 돈다발을 선물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냥 자기들끼리 주고받으면 될 것을 굳이 사진을 찍어 과시하듯 인터넷에 퍼뜨린 걸 보면 상대를 기쁘게 하기보다 스스로 만족하려고 한 일임에 틀림없다.

영국의 한 육가공회사는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붉은 쇠고기를 꽃처럼 말아 고기다발을 만든 적이 있다. 얼핏 빨간색 장미 꽃다발로 보이지만 금세 맛있는 고기임을 알고 고객이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선보인 기발한 상상력 아닌가. 베이컨을 돌돌 말아 구워 꽃다발처럼 만든 사진은 인터넷에 숱하게 돌아다닌다. 심지어 베이컨다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 사이트도 많다. 소소한 재미면서 실용적이기도 한 아이디어다.

그런데 고기나 베이컨으로 만든 다발은 솔직히 로맨틱하진 않다. 이미 익숙해져 설렘이 없는 커플이라면 모를까, 보통은 그런 것을 주고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얼핏 실용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선 가장 매력적인 게 자연 그대로의 꽃이다. 포장한 비싼 꽃다발이 아니어도 꾸밈없는 꽃을 꽃병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투자비 대비 몇십, 몇백 배의 만족을 얻을 것이다.

봄은 달력에 맞춰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따스해지고 로맨틱해지면 오는 게 아닐까. 봄기운이 다가오기 시작한 이때 꽃 한 다발로 집 안에서 봄의 사치를 누려보길!



주간동아 927호 (p74~75)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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