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4

2013.04.22

여러 번 짜깁기 위조된 ‘퇴우이선생진적’ 서화첩

본래 ‘이사천의 시’도 없고 ‘부화’도 형식 어긋나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4-22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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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번 짜깁기 위조된 ‘퇴우이선생진적’ 서화첩

    1 ‘퇴우이선생진적’의 임헌회 가짜 글씨. 2 ‘퇴우이선생진적’의 이병연 가짜 글씨. 3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이병연이 쓴 시.

    언젠가 필자는 중국 고고학계 원로들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 무덤을 발굴하다 보면 어떤 것은 수백 년 사이로 여러 번 도굴돼 부장품은 없어진 지 오래고, 무덤 안엔 도굴꾼의 연장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무덤 형식과 도굴꾼이 남겨놓은 연장을 통해 무덤 제작 및 도굴 시기를 대략적으로 찾아낸다고 했다.

    고서화 감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여러 면으로 이뤄진 서화첩(書畵帖)의 경우 오랜 세월 여러 컬렉터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위조자나 사기꾼을 만나면 서화첩 일부가 가짜로 위조되거나, 전부 가짜로 채워진다. 이는 마치 도굴꾼이 무덤에서 부장품을 빼가듯, 위조자가 서화첩에서 진짜를 야금야금 빼가고 그 자리에 가짜를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듯

    감정은 단순히 작품 진위만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가짜가 그동안 진짜로 행세할 수 있던 데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감정은 가짜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위조자나 사기꾼의 수단까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가짜를 중심으로 벌어진 위조와 사기의 전모는 가능한 한 가짜의 제작 과정을 재구성하고, 가짜의 모델이 된 진짜를 추정해 재구성할 때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1000원권 뒷면 그림인 가짜 ‘계상정거도’가 실린 ‘퇴우이선생진적’(보물 제585호)은 언제 어떻게 위조한 것일까. 필자가 ‘주간동아’ 883호에서 규명했던 것처럼 ‘퇴우이선생진적’에 쓴 컬렉터 임헌회(1811~1876)의 글씨(그림1)는 가짜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임헌회가 죽은 1876년 이후 이 서화첩은 그의 자손에 의해 팔렸고, 나중에 위조자가 ‘그림1’조차 위조했다는 사실이다.



    임헌회는 글에서 ‘퇴우이선생진적’이 “정선 이후로 몇 사람을 거쳐 나의 소장품이 됐는지 모른다. 지극한 보물은 내 것으로 만들기 어려우니, (중략) 다른 날에 다른 사람의 소장품이 되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염려처럼 그가 소장했던 ‘퇴우이선생진적’은 타인의 소장품이 됐다.

    여기서 주의가 필요한 점은 현재 전하는 ‘퇴우이선생진적’이 그가 소장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의 4폭 그림, 사천 이병연(1671~1751)과 임헌회의 글씨 모두 임헌회 사후에 이 서화첩을 소장했던 위조자나 사기꾼이 다시 위조한 것이다. 그 솜씨로 보면 대략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번 짜깁기 위조된 ‘퇴우이선생진적’ 서화첩

    4 ‘퇴우이선생진적’의 앞표지. 5 정만수 글씨와 한 위조자가 쓴 앞표지 및 정선의 그림에 쓴 글씨 비교.

    임헌회의 글에서 ‘이사천의 시(詩)’가 언급된 것을 보면, 1872년 늦봄 그가 사들였던 ‘퇴우이선생진적’은 1746년 정만수(1710~1795)가 만든 ‘퇴우이선생진적’이 아니다. 1746년 표구를 마치고 쓴 정만수의 글에 ‘이사천의 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만든 ‘퇴우이선생진적’엔 본래 ‘이사천의 시’가 없었다. 임헌회가 소장했던 ‘퇴우이선생진적’도 위조된 것이었다.

    ‘퇴우이선생진적’에 실린 이병연의 글씨(그림2)를 그의 진짜 글씨(그림3)와 비교하면 위조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퇴계 이황(1501~1570), 우암 송시열(1603~1689), 정선과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짙푸른 소나무 주변 대나무 바람소리 속에 간략하게 붓을 써서 아이들에게 그려주네. 망천도(輞川圖)는 다른 이가 그린 게 아니라, 망천장(輞川莊) 주인인 왕유(王維)가 그린 그림이다. 병인년(1746) 가을에 벗 사천노인(松翠之邊竹中, 揮毫草草應兒童. 輞川不是他人畵, 畵是主人摩詰翁. 丙寅秋, 友人 老).”

    여러 번 짜깁기 위조된 ‘퇴우이선생진적’ 서화첩

    6 1746년 정만수가 표구한 ‘퇴우이선생진적’ 가상도.

    34억 원 낙찰…위조와 사기는 한통속

    여러 번 짜깁기 위조된 ‘퇴우이선생진적’ 서화첩

    7 필자가 지명을 표시한 조작된 ‘계상정거도’ 실경 사진.

    ‘퇴우이선생진적’의 앞표지(그림4)에 쓴 ‘부화(附畵)’ 또한 형식에서 어긋난다. ‘퇴우이선생진적’은 말 그대로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 두 선생의 글씨를 서화첩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1746년 정만수가 만든 서화첩 표구에서 앞표지에 정선 그림에 대한 표기가 들어갔을 리 없다. 이 또한 무식한 후대 위조자가 저지른 실수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2012년 9월 11일 K옥션 가을경매 도록에서 “표지에 쓴 ‘계상정거(溪上靜居)’ ‘무봉산중(舞鳳山中)’ ‘풍계유택(楓溪遺宅)’ ‘인곡정사(仁谷精舍)’는 정만수의 글씨로 보인다. 첩 발문과 같은 정만수의 서체로, 겸재의 글씨 풍과도 흡사하다”고 했다. 정만수 글씨와 정선의 그림, 앞표지에 있는 글씨를 비교하면 정선 그림과 앞표지에 있는 글씨는 한 위조자가 썼다(그림5). 사실 정만수는 이병연의 글씨를 배웠다.

    이제 1746년 정만수가 만든 ‘퇴우이선생진적’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그림6). 앞표지엔 ‘퇴우이선생진적’이라 쓴 제첨이 붙어 있고 1, 2면에는 여백 종이가 있다. 3, 4면에는 정선의 ‘계상정거도’가 있고 5, 6, 7, 8면에는 이황의 글씨가 있으며 9, 10면에는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11, 12, 13면에는 정선의 ‘무봉산중’ ‘풍계유택’ ‘인곡정사’가 있고, 14면에는 정만수의 글씨가 있다. 15, 16면에는 여백 종이가 있고 다음은 뒤표지가 있다.

    미술시장에서 위조와 사기는 한 팀이다. 가짜 ‘계상정거도’는 위조자가 잘못 베껴 그렸지만, 정선의 원작은 도산(陶山)과 ‘우뚝우뚝 높이 솟은(聳峯巍)’ 서취병 실경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의 사진은 도산 위치에 석간대, 높이 솟은 서취병에 낮은 서취병의 끝부분, 낮은 서취병의 시작 부분에 동취병의 끝부분을 담았다(그림7). 이 교수는 가짜 ‘계상정거도’의 서취병이 실경과 많이 달라, 사진을 가짜 그림과 비슷하게 조작한 것이다. 이는 학자적 양심을 버린 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퇴우이선생진적’이 34억 원에 낙찰됐다고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졸렬한 가짜가 비싼 값에 팔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작품을 사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만 가지고는 좋은 작품을 살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작품 진위와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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