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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성폭력 사회 03

심각성 모르는 가해자 치가 떨리는 피해자

직장 내 성희롱 쉬쉬 여전…음담패설도 당사자가 문제제기하면 성희롱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심각성 모르는 가해자 치가 떨리는 피해자

심각성 모르는 가해자 치가 떨리는 피해자
#1 초등학교 교사 A씨. 학교 전체 교직원이 워크숍을 가려고 버스를 탔다. 이때 학교 교장 B씨가 음담패설을 했다. 여자와 무의 공통점, 수험생과 신혼부부의 공통점, 책과 여자의 공통점, 김삿갓 일화 등을 늘어놨다. 남성, 여성 성기를 지칭하거나 한자 풀이를 빙자해 성기를 언급한 것이다. 이에 A씨를 비롯한 교직원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2 C관리사협회 D시회. 남성 회원인 E씨는 D시회 게시판에 수차례 글을 쓰면서 여성회를 근거 없이 비하하며 언어적 성폭력을 일삼았다. 한 번은 ‘몸으로 때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성상납이 과연 지어낸 이야기일까’라는 글을 올려 여성 회원들이 성상납하는 것처럼 묘사해 여성 회원들에게 성적 굴욕감을 줬다.

#3 기독교서적 출판사 사장 F씨. 직원 G씨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이를 달래면서 당사자 의사는 고려하지 않고 두 팔로 끌어안았다. 또한 회사 복도에서 H씨와 마주치자 “귀가 복스럽다”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이에 G씨와 H씨는 불쾌감을 느꼈다.

위 사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간한 ‘성희롱 진정 사건 백서’에 수록된 성희롱 사건이다. 사례 1, 2, 3은 성희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조금씩 다르다. 1은 언어적 성희롱, 2는 시각적 성희롱, 3은 육체적 성희롱에 해당한다.

언어적, 육체적, 시각적 성희롱



성희롱은 통상 개인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 근로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다. 이는 언어적(음란한 농담을 하거나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 또는 평가를 하는 행위), 시각적(음란한 사진, 그림, 낙서, 출판물 등을 그리게 하거나 보여주는 행위. 컴퓨터와 휴대전화 포함), 육체적(입맞춤이나 포옹, 특정 신체 부위를 만지는 행위) 성희롱으로 나뉜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은 성희롱을 ‘육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시각적 행위, 그 밖에 사회 통념상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언어나 행동’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성희롱 유형을 이처럼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단법인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이영희 고용평등상담실장(노무사)은 “성희롱을 언어적, 육체적, 시각적 성희롱으로 분류한 것은 성희롱의 다양한 사례를 알리는 차원”이라면서 “성희롱 대부분은 언어적, 육체적, 신체적 성희롱이 복합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이 단체는 성차별, 모성권, 성희롱, 비정규직 등 사안을 상담하는 곳으로, 1년 평균 200건에 달하는 성희롱 사건을 맡는다. 우리나라에 성희롱 사건을 상담하는 고용평등상담실은 14곳에 달한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성희롱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자. 성희롱 대처 방안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피해자가 직장에 성희롱 고충을 신고해 문제를 공론화한 뒤 사과 등을 받고 해결하는 방법, 둘째 국가인권위원회, 노동위원회, 노사협의회, 지방노동관서 같은 국가기관에 진정하는 방법, 셋째 법원에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례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성희롱 피해자를 돕는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단체에서는 상담 내용을 비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간동아’는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센터)가 발간한 ‘여성 노동’에 수록된 사례에 주목했다.

#4 A산업개발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I씨. 설계회사 주임인 그는 사장이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해서 동행했는데, 술에 취한 사장이 과도한 스킨십을 시도했다. 이에 I씨는 여성 상사에게 고충을 토로하면서 그런 행위가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I씨는 다른 여직원들과 함께 정리해고됐다. I씨는 정리해고된 J씨와 함께 센터를 찾아왔다.

#5 B기업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K씨. 기업 대표자와 동업 관계인 전무이사는 K씨와 단둘이 사무실에 있을 때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했다. 이에 피해자가 회사 대표에게 문제제기해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자 피해자는 상담을 자청했다.

#6 C호텔 여성 근로자 L씨는 부하인 남성 직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노래방에서 부하가 상사 엉덩이를 만진 것이다. 당시 L씨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1년 뒤 부하직원이 L씨를 모함했다. 부하직원을 괴롭혀 직원 이직률이 높다는 것. L씨는 성희롱 때문에 부하직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소명하려고 센터를 찾았다.

증거자료 확보해야 유리

심각성 모르는 가해자 치가 떨리는 피해자

여성가족부가 제작한 성희롱 방지 포스터.

각각의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사건은 피해자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먼저 ‘피해자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했다. 사례 4의 경우, 피해자들은 피해보상금을 받고자 했고, 그 결과 피해보상금 1000만 원을 받고 사건을 종결했다. 반면 사례 5는 흐지부지됐다. 센터 측에서도 피해자가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결국 피해자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가해자도 처벌받지 않았다(성희롱 사건의 가해자를 무조건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성희롱 관련 법제에 따라 회사 내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국가기관 권고에 따라 피해보상금으로 종결하는 경우도 많다).

성희롱 사건을 문제제기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증거자료. 성희롱 증거를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현장을 복원하기는 어렵지만, 가해자가 사안의 심각성을 몰라 피해자에게 그 상황을 시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피해자는 녹음기에 그 내용을 기록해두면 좋다. 위 세 사례의 경우 피해자 모두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사례 6의 피해자가 회사 측으로부터 합당한 조치를 받았던 것도 증거자료를 제출한 덕분이다. 성희롱을 목격한 동료 직원들은 회사 자체적으로 성희롱 조사가 진행되자 “성희롱이 없었다”라고 발뺌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성희롱 조사가 진행되기 전 동료 직원들이 자신에게 “그때 성희롱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고 말한 내용을 녹취했고, 이를 인사위원회에 제출했다.

물론 이렇게 공론화되는 성희롱 사건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란 말이 사용된 것은 서울대 여성 조교가 교수의 신체적 접촉을 거부한 것을 이유로 해임 당했다며 1993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다. 곧이어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에 “국가, 지방자치단체, 사업주는 성희롱의 예방 등 평등한 근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해 ‘성희롱’이란 용어를 도입하고 법률로 구제책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희롱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부족하다. 이영희 노무사의 말이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여성의 성희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느낀다. 물론 회사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1년에 한 차례 진행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제 강의가 아닌 동영상 강의로 대체하다 보니 유명무실해졌다.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회사에서 예방교육을 받았는지 반드시 묻는다. 성희롱을 방지하려면 개인을 처벌하는 데서 끝날 게 아니라 회사 문화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은 그 교육을 대충 받나 봐요. 자기 행동이 잘못된 줄 몰라요’라고.”



주간동아 881호 (p30~31)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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