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4

2012.09.10

여성 시선으로 노래한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컴필레이션 앨범 ‘이야기해주세요’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2-09-10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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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시선으로 노래한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순백의 종이에 쓰여 있다. “이야기해주세요.” CD를 꺼낸다. 플레이어에 건다. 열다섯 팀이 열여섯 곡의 노래를 부른다. 모두 여성 목소리다.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큰 고초를 겪은 할머니들에 대해. 20년간 매주 수요일 한 주도 빠짐없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여온 할머니들에 대해.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배상을 받지 못한 할머니들에 대해.

    한희정, 정민아, 오지은, 소히, 이상은, 지현, 무키무키만만수, 시와, 투명, 황보령, 송은지, 남상아, 강허달림, 트램폴린, 휘루. ‘이야기해주세요’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일반적인 컴필레이션 앨범은 제작사나 단체가 기획한다. 아티스트를 모으는 것도 일이거니와, 이해관계와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도 적잖은 수고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한국에서 발매한 대부분의 컴필레이션 앨범은 뮤지션이 아닌 매니지먼트가 제작했지만(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여성 뮤지션들이 기꺼이 그 수고로움과 번잡함을 감수하고 나선 것이다.

    시작은 이랬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보컬 송은지, 보사노바 뮤지션 소히, 가야금 연주자 정민아 등이 몸담았던 ‘릴리스의 시선’이란 소모임에서 자연스럽게 위안부 문제가 나왔다. 지난해 말 1000회를 넘어선 수요집회, 61명(8월 31일 할머니 한 분이 사망해서 현재는 60명)밖에 남지 않은 생존자…. 막연한 생각들이 급물살을 탔다. 그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음반을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오직 여성 뮤지션들의 시선과 노래로 말이다.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함께하고 싶은 뮤지션이 있으면 친분이 없음에도 공연장 대기실로 찾아가는 ‘뻘쭘함’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뮤지션 열다섯 팀이 모였다.

    제작비는 3차례 모금 공연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련했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혹은 자신의 할머니를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고 녹음했다. 차가운 날을 세우는 대신 따스한 손길을 담은 메시지로. 자신들이 평소 해오던 바로 그 음악으로. 페미니즘, 아니 여성 인권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던 시대를 살아온 당신들을 노래에 담았다. 그리고 그 당신들의 이야기에 바로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투영된다.

    ‘이 노래를 부탁해/ 끊이지 않는 비극/ 너와 나의 무관심을 노래해 줘.’(한희정의 ‘이 노래를 부탁해’)



    ‘누가 나를 이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곳.’(오지은의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옆구릴 스치는/ 느물거리는 손, 심증의 움직임.’(소히의 ‘심증’)

    이런 곡은 야만적인 남성성의 대상이 비단 종군위안부에 국한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도 남성의 폭력이 자행되는 등 남성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서 여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음을 옅은 안개처럼 노래에 담아낸다. 무키무키만만수의 ‘구순이’는 ‘그 고통을 어찌 다 잊겠니 나는/ 눈도 코도 이젠 흐릿한데 나는’ 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세월을 노래하고, ‘사실 그것은 거짓말 같은 이야기/ 바로 내 이야기 나의 이야기’라는 가사를 통해 결국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곤란함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는 여성 ‘뮤지션’이 아닌 ‘여성’ 뮤지션으로 대접받는 불편함도 개입됐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언론과 대중은 인디신(인디밴드가 활동하는 장소나 무대)에서 활동하는 여성 뮤지션들 앞에 ‘여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당사자들이 인터뷰나 트위터를 통해 여신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소용없었다. ‘이야기해주세요’는 뮤지션들에게 가해지는, 이 이상한 젠더 프레임을 스스로 깨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앨범은 위안부 할머니뿐 아니라 지금 이 땅의 ‘여성’을 고민하는 모든 이와 나누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도 ‘뮤지션’도 아닌, ‘여성 뮤지션’의 이야기 말이다. 앨범 수익 전액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쓰는 ‘이야기해주세요’가 올해 최고의 앨범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야기해주세요’가 올해 가장 의미 있는 앨범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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